느린 폭력은 극적이거나 즉각적이지 않아 비가시적이지만 점점 더 불어나고 축적되어 그 영향력이 오랜 기간 넓은 규모에 걸쳐 퍼져가는 폭력이다. 이 개념은 롭 닉슨(Rob Nixon)이 『느린 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Slow Violence and the Environmentalism of the Poor)』(2011)에서 도입했다. 폭력은 보통 시간상으로는 즉각적이고 공간상으로는 폭발적이며, 눈앞에서 충격적으로 펼쳐지는 사건이나 행동을 지칭한다. 롭 닉슨은 그와는 다른 유의 폭력을 느린 폭력이라 명명하고, 그것을 ‘눈에 보이지 않게 일어나는 폭력, 시간과 공간을 넘어 널리 확산하는 시간 지체적 파괴, 일반적으로 전혀 폭력으로 간주되지 않는 소모적 폭력’(Rob Nixon: 2011, 2)이라 정의한다.

느린 폭력이라는 개념은 레이첼 카슨이 『침묵의 봄(Silent Spring)』에서 쓴 “간접적 사망(death by indirection)”(Rachel Carson, 1962: 32)이라는 표현과 노르웨이의 사회학자 요한 갈퉁(Johan Galtung)이 만든 “구조적 폭력(structural violence)”(Johan Galtung: 1969, 171–183)이라는 용어와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레이첼 카슨은 독성 물질의 이동으로 느리고 형태가 없이 모호하게 작용하는 폭력에 관심을 기울였다. 롭 닉슨은 레이첼 카슨의 사례에서 대중들에게 오랜 기간에 걸쳐 일어나는 무차별적 피해를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내러티브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또한, 사적 폭력 행위를 일으킬 수 있고 그 자체로 폭력의 형식이 될 수 있는 방대한 구조를 강조했던 요한 갈퉁의 이론에서 사회 정의, 숨은 행위자, 인지하기 어려운 특정 형태의 폭력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고 그것을 느린 폭력이라는 용어로 확장했다. 약 40년 전 갈퉁이 제시한 구조적 폭력은 기본적으로 정적인 것이었다. 롭 닉슨은 속도와 스펙터클에 치중하는 미디어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상황을 고려하여 정적 함의를 지닌 구조적 폭력과 달리, 느린 폭력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점진적이기는 하나 시간(time), 이동(movement), 변화(change)와 같은 문제들’(Rob Nixon: 2011, 11)을 부각했다.

느린 폭력의 사례로는 석유 화학 산업, 메가 댐 건설, 정밀 타격전, 식민지 개발, 골프장 및 호텔 건설 등을 들 수 있다. 이 같은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느린 폭력은 생태계의 파괴와 공동체의 축출만이 아니라 원주민의 자원 주권 및 민주주의적 열망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결과를 낳는다. 또한, 자원이 결핍된 가난한 사람들을 주요 희생자로 삼아 사회적 불평등을 가속화한다. 이처럼 느린 폭력은 그 폐해의 파급력이 광범위하고,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시간의 한계를 넘어서 확대된다. 그리고 정치적·경제적 이익 집단이 다양한 과학적 방법론을 동원해 얼마든지 조작 가능하여 그와 관련한 상반된 진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 느린 폭력이 지닌 이 같은 특성 때문에 롭 닉슨은 느린 폭력의 위협을 감각적으로 이해 가능하게 표현할 수 있는 ‘환경 작가-활동가(environmental writer-activists)의 정치적, 창의적, 전략적 역할’(Rob Nixon: 2011, 15)을 강조했다.

참고문헌:

Galtung, Johan, “Violence, Peace, and Peace Research,” Journal of Peace Research, Vol. 6, No. 3, 1969.

Carson, Rachel, Silent Spring, Boston: Houghton Mifflin Company, 1962.

Nixon, Rob, Slow Violence and the Environmentalism of the Poor, Cambridge, Massachusetts, and London, England: Harvard University Press, 2011.

작성자: 조윤정(국민대학교 교양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