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스 버틀러는 취약성(vulnerability)을 인간 존재의 근본 조건으로서 재해석하며, 이를 통해 이를 통해 현대 사회가 직면한 폭력과 불평등에 응답할 수 있는 윤리적·정치적 가능성을 타진한다. 버틀러에게 취약성은 단순히 상처받기 쉬운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타자의 돌봄과 언어, 제도에 의존한 채 존재하며, 이는 곧 타자에 대한 개방성과 의존성이라는 존재론적 조건을 드러낸다. 인간은 스스로를 유지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타자와의 관계에 기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의존의 상태는 자율적 주체가 형성되기 이전부터 작동하는, 구조적이고 선행적인 조건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육체적인 요구조건 때문에 일차적 타인에게 내맡겨진 존재”이다(버틀러, 2018:62). 이는 한 개인, 특히 갓난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타인—예컨대 부모—의 신체와 돌봄, 보호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뜻한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나’는 이미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 존재하게 되며, 취약성은 주체의 형성에 선행하는 근원적 상태로 작동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취약성은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e)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이러한 사유는 취약성을 고립된 결핍이나 약점이 아니라, 존재들이 상호적으로 얽혀 있는 조건으로 재해석한다. 인간은 언제나 타인의 행위, 언어, 제도와 관계 맺으며 살아가고, 우리의 삶은 이러한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타자의 응답과 인정, 돌봄 없이는 주체로서의 삶도 구성될 수 없다. 따라서 취약성은 폐쇄된 자아의 한계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책임을 묻고 응답할 수 있도록 하는 윤리적 조건이다. 우리는 타자의 삶에 응답할 책임이 있으며, 동시에 우리의 삶 역시 타인의 응답 가능성에 의존하고 있다. 이로써 취약성은 윤리적 관계성의 기반이자, 응답 가능성의 근간이 된다.
버틀러는 이러한 윤리적 사유를 정치적 윤리의 기반으로 확장한다. 특히 ‘위태로운 삶(precarious life)’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회적으로 분배되는 취약성의 불평등을 비판한다. 어떤 삶은 국가와 제도의 보호를 받으며 애도되고 존중받지만, 어떤 삶은 사회적 시야에서 지워진 채 방치되거나 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된다. 다시 말해, 누가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로 여겨지고, 누가 배제되는가의 문제는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취약성의 윤리로부터 파생되는 정치적 질문이다.(버틀러, 2021:31~32) 버틀러는 이러한 구조적 불평등 속에서 인간의 상호의존성과 공동의 취약성을 인식하는 일이야말로, 윤리적 연대와 비폭력적 실천을 요청하는 출발점이라고 여긴다.
이러한 맥락에서 버틀러의 윤리는 궁극적으로 비폭력(nonviolence) 개념으로 수렴된다. 버틀러에게 비폭력은 단순히 물리적 폭력을 피하는 소극적 태도가 아니라, 타자의 고통과 취약성에 민감하게 응답하고, 그 관계를 파괴하지 않도록 돌보는 적극적인 윤리적 태도이다. 버틀러는 9.11 테러 사건을 언급하며 그와 같은 “취약성과 상실의 경험”(버틀러, 2018:9)으로부터 우리는 인간의 공통적 취약성을 자각하고, 상호의존성을 기반으로 한 비폭력적인 공동체를 상상할 기회를 얻게 된다고 주장한다. 비폭력은 타자의 존재 조건을 존중하며, 그 삶의 지속 가능성을 함께 책임지는 행위로서, 응답성(responsiveness)과 책임(accountability)에 기반한 정치적 실천이다.
결국, 버틀러의 취약성 윤리는 인간 존재의 취약한 조건으로부터 윤리적 관계성과 정치적 공동성을 사유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이는 자율성과 독립을 중심에 두는 근대적 주체 윤리를 넘어서, 연루됨(entanglement),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e), 응답 가능성(responsiveness)을 중심으로 새로운 윤리적 주체성을 구성하려는 시도이다. 취약성은 연약함이 아니라, 타자와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는 조건으로서의 힘이며, 그것은 연대를 가능하게 하고 공동체를 구성하는 비폭력적 윤리의 기초가 된다.
참고문헌
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윤조원 옮기, 필로소픽, 2018.
주디스 버틀러, 『비폭력의 힘』,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21.
작성자: 김혜선 (한양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