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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원자론자들의)
  분류 : 공간철학
  영어 : kenon(void)
  한자 : 虛空


‘허공’(void, kenon, 虛空)은 원자론자들과 스토아 철학자들이 생각한 공간 개념으로서 비어있는 무한한 공간을 의미한다. 헤시오도스의 ‘카오스’(chaos)와 플라톤의 ‘코라’(chōra)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장소’(topos)가 한정된 공간이라면 원자론자들의 ‘허공’은 무한한 공간으로 이해된다.

‘허공’은 원자들이 결합하고 분리할 수 있는 자유로운 활동의 여지로서 열려진 무한한 공간이다. 원자론자들은 ‘원자’와 ‘허공’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한다. 원자는 꽉 차 있어서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가장 작은 물질 조각이다. 원자론자들은 이러한 원자들이 서로 결합함으로써 사물이 생성되고, 또 결합되어 있던 원자들이 분리됨으로써 사물이 소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원자들의 결합과 분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원자들이 이합집산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여지로서 열려진 공간인 ‘허공’이 있어야 한다.

최초의 원자론자인 류키포스(Leucippus)에 따르면 원자들이 ‘허공’에서 회전 운동을 하는 가운데 비슷한 것들끼리 결합하여 세계가 생겨난다(DK67A1). 원자들의 회전운동과 결합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허공’이다. 있는 것이 엄격한 의미에서 꽉 차 있는 것이라면 ‘허공’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운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허공이 있어야 한다(DK67A7). 이것은 “만약 ‘허공’이 없다면 운동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운동이 있다. 그러므로 ‘허공’도 있다.”라는 원자론자들의 기본적인 우주론으로 표현된다(Furley, 1989: 78).

데모크리토스(Democritus)는 실체(ousia)들 각각을 ‘어떤 것’(to den), ‘꽉 찬 것’(to naston), ‘있는 것’이라고 부르는데 반하여, 장소(ho topos)는 ‘허공’(kenon), ‘아무 것도 아닌 것’(to ouden), ‘한정되지 않은 것’(to apeiron)이라고 불러 원자와 ‘허공’을 구별하고 있다.(DK68A37) 그러나 데모크리토스 역시 ‘어떤 것’(den)이 ‘아무 것도 아닌 것’(mēden)보다 더 있는 것은 아니라고 규정함으로써 ‘허공’의 존재를 인정한다(DK68B156).

에피쿠로스(Epicurus)에 따르면 원자들은 그 수에 있어서 무한하며 공간 역시 그 양에 있어서 무한하다(Long & Sedley, 1987: 44). 또 원자들의 운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 무한한 공간은 근본적으로 비어있어야 한다.

에피쿠로스는 공간을 ‘만져서 알 수 없는 실체’라고 부르면서 그것을 3가지로 구분하고 있으니, 물체가 없는 빈 상태의 공간은 ‘허공’이요, 물체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은 ‘장소이며, 물체들이 그 안에서 운동하는 공간은 ‘코라’이다. 공간이 ‘만져서 알 수 없는 실체’로 불리는 까닭은 그것이 촉각에 의해 알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Long & Sedley, 1987: 28).

‘허공’이 비어 있다는 의미에서 점유되지 않은 공간을 지칭한다면, ‘장소’는 어떤 대상이 공간을 점유하고 있으나 그 상태가 정적인 공간이요, ‘코라’는 움직이는 사물에 의해 점유된 공간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어떤 것이 그 안에서 움직일 수 있는 여지로서의 공간이다. (Casey, 1998: 83)

에피쿠로스에게 있어서 ‘허공’은 원자로 이루어진 물체가 다양한 장소를 차지하는 무대로서 “물체들에게 위치를 부여하며, 그들 사이의 간격을 주고, 움직일 코라를 준다.”(Long & Sedley, 1987: 30.) 그러므로 에피쿠로스에게 있어서 ‘허공’은 장소의 원천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Casey, 1998: 82)

에피쿠로스의 제자인 루크레티우스(Lucretius)는 “존재하게 될 것은 무엇이든지 자신 안에 ‘연장’(augmen)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비록 그것이 크든지 적든지 간에 그것이 존재하는 한에 있어서.”(Long & Sedley, 1987: 28)라고 말하면서 공간에 ‘연장’이란 개념을 도입한다. ‘연장’에 해당되는 그리스 말 ‘diastēma’는 ‘관통하여 서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공간적으로 있는 것은 공간 사이를 ‘관통하여’ 서 있는 것이며 또한 밖으로 뻗어 ‘연장되어’ 있는 것이다. ‘관통’은 ‘허공’ 안에서 이루어지는 운동에 수반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방법 안에 포함되어 있다.(Casey, 1998: 84)

원자론에 있어서 ‘모든 형태의 다양성’은 처음부터 이미 주어져 있다. 원자론자들이 생각하기에 ‘거대한 허공’과 ‘많은 물체들’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다. 이것들로부터 모든 것들이 잇달아 생긴다. 우주의 생성은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원자론자들이 ‘허공’ 개념을 통해서 제시하는 그들의 공간 이해는 무한성과 연장성이라는 측면에서 이전의 공간 이해와는 특별히 구별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원자론자들은 두 가지의 무한성을 주장하고 있는데 하나는 원자들의 무한성이며 또 하나는 ‘허공’으로 불리는 공간의 무한성이다.(Casey, 1998: 80) 더 나아가 원자론자들이 공간 개념에 ‘연장’이라는 의미를 부가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그들의 공간 이해는 ‘토포스’를 제한된 표면으로 규정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공간 이해와 대비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김인곤 외 역.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서울: 아카넷, 2008.
Casey, Edward S. The Fate of Place.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8.
Diels, Hermann & Kranz, Walther. Die Fragmente der Vorsokratiker. Berlin: Weidmannsche Verlagsbuchhandlung: 1959.
Furley, David. “Aristotle and the Atomist on Motion in a Void,” in Cosmic Problem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9.
Long A. A. & Sedley D. N. The Hellenistic Philosophers Ⅰ.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7.

작성자: 이상봉(경북대학교 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