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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과 상징공간(부르디외의)
  분류 : 공간사회학
  영어 : champ(field), espace symbolique(symbolic space)
  한자 : 場, 象徵空簡


,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실천의 공간


(field)은 사회공간의 일부이자 특수한 실천을 위한 제도적 공간을 의미한다. 장 개념을 체계화시킨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고도로 분업화된 사회에서 사회적 우주 social universe 는 수많은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사회적 소우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사회적 소우주는 다른 장으로 환원될 수 없는 독특한 논리와 필연성을 가진 객관적인 관계들의 공간이다. 예를들어 예술장, 종교장, 경제장은 모두 특수한 논리를 따른다.”(Bourdieu and Wacquant 1992:97) 하나의 장은 역사적 산물이기도 하다. 장으로서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율성은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 속에서 참여자들의 투쟁을 통해 얻어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예술장은 전체 사회공간을 구성하는 소우주이면서, 오직 예술적 실천이라는 특정한 행위를 허락하는 공간임에 틀림없지만 예술장이 예술적 가치 이외의 그 떤 것도 허락하지 않지 않는 자율적 공간이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Bourdieu, 1996).


정초된 환상, 일루지오


하나의 독립된 장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오직 특정한 실천을 통해서만 전유되는 가치를 다른 가치들로부터 분리해낼 수 있어야 한다. 부르디외는 이 가치를 도박에 빗대어 내기물로 은유하는데, 이는 곧 특정 장의 참여자들이 전유하고자 하는 투쟁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장은 그 장의 고유한 이해관계와 내기물(stakes), 그리고 그러한 내기물을 차지하기 위해 투쟁에 기꺼이 동참하는 행위자들로 이루어진다. “장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내기물과 유희를 할 준비가 된 사람들, 즉 유희의 내재적 법칙들과 내기물들에 대한 지식, 그리고 내기물들이 지닌 사회적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아비튀스의 보유자들을 필요로 한다.”(Bourdieu, 1994a:124). 장의 참여자들이 장 내부의 내기물을 놓고 투쟁하기 위해서는 장의 지배적인 가치체계, 목표를 참여자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정초된(well-founded) 환상’(선내규, 2008:550), 즉 일루지오(illusio)를 필요로 한다. 일루지오는 내기물의 가치에 대한 신념과 믿음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환상에 불과하지만, 장 내에서 객관적인 형태로 제도화된다는 점에서 단순한 환상을 넘어선 사회적 사실’(social fact)로 존재한다. 장의 참여자들은 일루지오 속에서 일정한 방식으로 자신의 실천을 조직한다.


조직된 실천의 논리, 아비튀스


부르디외는 특정한 장 내에서 조직된 실천의 논리를 아비튀스’(habitus)로 호명한다. 아비튀스는 실천을 발생시키는 자발적이고 무의식적인 지각의 도식이며, “가장 개연적이지 못한 실천들을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서 배제”(Bourdieu, 1990:53)함으로써 얻어지는 가능성들의 공간’(space of possibles)을 설정한다. 그러한 일루지오와 아비튀스를 바탕으로 장의 참여자들은 장 내 내기물이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는 암묵적인 동의 위에서 기꺼이 그것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 참여한다.


장의 역학으로서의 상징투쟁


장은 균질한 상태가 아니라 유동적이고 불균등한 지형을 이루며, 그 지형은 상호대립하는 참여자들의 투쟁에 따라 변화한다. 참여자들의 투쟁은 곧 장의 변동의 역학이라 할 수 있다. 장 내 투쟁을 통해 축적되는 가치의 총량은 해당 장의 참여자들의 위계와 장의 지배권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자본’(capital)으로 기능한다. 중요한 것은 이 자본은 해당 장의 참여자들의 인정’(recognition)에 의해 주어지며, 장 밖의 논리를 부정함으로써 얻어진다는 점에서 일종의 상징자본’(symbolic capital)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상징자본은 으로 표현되는 상업적 이익(경제자본)에 대한 의식적 거부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장은 특정한 아비튀스를 공유하는 참여자들에 의해서만 인식되는 특수한 인정과 권위, 그리고 참여자들의 장 내 투쟁을 통해 차별적으로 배분되고 축적되는 상징자본의 양에 의해 지배되는 상징공간이라 할 수 있다.


장과 사회공간의 상동성


흥미로운 것은 장과 사회공간 사이에서 나타나는 역설이다. 장은 장 밖의 사회공간과는 분리된 자율적 공간이면서 동시에 사회공간과 관계를 맺는다. 부르디외가 장을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소우주’(relatively autonomous microcosmos)로 묘사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장의 자율성(autonomy)은 사회공간과의 관계(relation) 속에서 획득된다는 것이다. 사회공간과의 관계에서 관건은 장 밖의 영향을 얼마나 장 내부의 논리를 통해 굴절혹은 변환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장의 자율성은 그 굴절과 변환의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특정한 장이 아무리 자율적인 경우라 하더라도 사회공간의 관계 속에서 권력과 자본과 같이 사회공간의 지배적인 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특히 예술장, 언론장, 학문장과 같은 문화재 생산의 장(field of producing cultural goods)은 장으로서의 고도의 자율성을 획득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국가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부르디외, 2001:252) 국가와 자본은 사회공간의 지배적 아비튀스를 구축하고, 이는 장 내 투쟁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끈다. 따라서 문화장 내 투쟁은 사회공간의 지배계급의 요구에 정합적인 방식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부르디외는 이를 장과 사회공간, 혹은 특정 장과 다른 장들 사이의 구조적 상동성’(structural homogeneity)으로 호명한다.

장과 장들 사이의 상동성에 관해 부르디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데올로기 생산의 장이 가지는 적절한 이데올로기적 기능은 이데올로기 생산의 장과 계급투쟁의 장 사이의 구조적 상동성이라는 근거 위에서 자동적으로 수행된다. 이들 두 장들 사이의 상동성이란, 자율적인 장의 특수한 대상들을 둘러싼 투쟁들이, 계급들 사이의 완화된 정치적 투쟁 형태를 자동적으로 산출해 낸다는 것을 의미한다”(Pierre Bourdieu, 1994b:169)


상징공간으로서의 장의 출현, 의의와 한계


장은 사회공간과의 관계 속에서 그 영향을 받되 그 힘을 굴절, 변환시켜내는 참여자의 실천을 통해서 역사적으로 형성된다. 자율적 장은 장 밖의 힘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는 상징의 논리에 의해 구동된다. 이점은 어떤 형태로든 경제의 우선성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맑시즘류의 기존의 사회이론과 비교할 때 큰 차이를 보인다. 경제를 부정하고, 오직 장 내부의 인정투쟁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명예의 전유와 그 명예의 불평등한 축적을 통해 구동되는 상징공간이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 상징공간의 상황은 경제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변환을 통해 상호작용하면서, 오히려 경제의 논리를 정당화하고 때로 변형시킨다. 부르디외가 상동성으로 호명하고자 했던 것도 그러한 상징공간의 구조와 사회공간의 계급구조 사이의 상호성이라 할 수 있다. 객관화된 형태로 제도화된 상징공간으로서의 장은 유일무이한 최종심급으로 규정될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경제와 상호작용하면서 사회를 구동시키는 주요한 토대라 할 것이다. 물론 한계 또한 없지 않다. 무엇보다, 장의 상대적 자율성에 관한 부르디외의 설명이 지나치게 자율성에 치우친 면이 없지 않다. 부르디외는 장과 다른 장들 사이의 관계성(상대성)에 관한 설명을 어디서도 충분히 제공하지 않는다. 그 결과 장의 자율성과 상동성이 공존하는 메카니즘은 여전히 공백으로 남아 있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장과 사회공간 사이의 상동성은 장 내 차별적 이해관계와 장 밖의 이해관계가 상호 부합할 때에만 가능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정작 장과 사회공간의 이해관계가 서로 정합하게 되는 과정과 메카니즘에 관해서는 밝히지 않고 있다(김동일, 2010). 물론 이러한 장의 자율성과 상동성의 압력 사이의 역학에 관한 설명의 부재가 다시 부르디외의 장이론은 또 다시 반영론의 그림자에 가두는 것은 아니다. 제도화된 상징공간으로서의 장의 자율성에 관한 부르디외의 논증은 반영론의 단순성을 훨씬 넘어서기 때문이다. 다만 자율적 장의 상징논리와 사회공간의 역학 사이의 변증법은 차별적 장의 역사 속에서 보다 구체적인 논의를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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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Pierre Bourdieu, The Logic of Practice, Cambridge: Polity Press, 1990.
Bourdieu and Wacquant. An Invitatioin to Reflexive Sociology,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2.
Pierre Bourdieu, Sociology in Question. SAGE publication, 1994a.
Pierre Bourdieu, Language and Symbolic Power, Cambridge: Polity Press, 1994b.
Pierre Bourdieu, The Rules of Art, Cambridge: Polity Press, 1996(하태환 역, 예술의 규칙, 동문선, 1999).
피에르 부르디외, 김웅권 역, 파스칼적 명상, 동문선, 2001.
김동일. “부르디외와 라투르의 대질과 수정: 사회과학 지식체계에서 장이론의 가능성과 한계”, 사회과학연구,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182, 2010.
선내규. “해방인가 상징폭력인가: 부르디외의 성찰적 사회학에 대한 비판적 고찰.” 사회과학연구,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2008.

작성자: 김동일(대구가톨릭대 사회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