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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노동의 영화적 재현
  분류 : 한국의 도시영화
  영어 : Labor mise-en-scène city movie
  한자 : 都市 勞動 映畵


‘노동(labor)’의 도시영화는 노동 공간을 배경으로 한 미장센을 보여준다. 노동은 인간 생존에 직결되는 행위로, 노동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를 의미한다.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노동이 비로소 사회 문제로 주목되어 왔는데, 이는 계급을 매개로 인간의 정체성과 사회적 행위를 이해하는 관점이 일반화되었음을 말한다. 그리고 산업생산의 출현 이래 공적․사적 영역에 따른 젠더와 공간의 이분법적 분리는 노동 공간에서 주목해야 할 사항이다.

한국 영화에서 노동은 인물의 일상과 정체성을 형성하는 주요 요소였다. 1960년대 도시의 하위 계급 중년남성을 다룬 <박서방>(1960, 강대진)과 <마부>(1961, 강대진)는 전근대와 근대의 갈등을 형상화한다. <박서방>에는 미장이 박서방(김승호 분)의 전근대적 사고방식과 임금노동자가 된 자식 세대의 근대적 사고방식 간의 갈등이 두드러진다. 박서방의 노동은 영화의 오프닝에서 아쿠스마틱(acousmatic) 사운드로 명료하게 전달된다. 음원의 출처가 보이지 않는 사운드로 어떤 가정주부가 그를 소리 높여 불러, 아궁이 좀 고쳐달라고 말하면 그는 곧장 가겠다고 답한다. 이는 전통사회에서 행랑채 머슴을 부리는 듯한 장면을 환기한다. 박 서방의 노동은 전근대적이고, 가정에 종속된 여성적인 것이다. 이는 한국 사회가 사적 영역을 담당하는 여성, 공적 영역을 담당하는 남성으로 뚜렷한 분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 있음을 나타낸다. 자식 세대에서 이 분리가 차츰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영화는 박 서방이 물지게를 지고 비탈길을 올라가는 모습에서 시작되는데 이 공간은 아이스크림과 참외 장사치, 손수레를 끄는 노점상, 복덕방 구전 받으러 가는 이들이 오가는 장소이다. 이 영화의 비탈길 같은 소로(path)는 사적 공간에서 나오면 곧바로 마주치게 되는 도시의 공적 공간이다(서영애, 조경진, 2006:75).

<마부>에는 한국 사회의 변화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로(main street)가 노동 공간으로 등장한다. 우마차로 화물을 나르는 직업을 가진 춘삼(김승호 분)은 자신 소유의 말이 없어서 사장의 것을 임차한 노동으로 자식을 키우고 있다. 영화에 나오는 대로는 그의 직장인 셈인데, 자동차와 말이 동시에 달리는 모습은 전근대와 근대의 혼재를 보여준다. 맏아들 수업(신영균 분)이 고시에 합격, 눈 내리는 중앙청 앞에서 감격스럽게 상봉하는 장면은 하층민이 꿈꾸는 계급 상승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이며, 중앙청은 그것을 승인하는 장소로 기능한다. <오발탄>(1961, 유현목), <삼등과장>(1961, 이봉래)은 임금노동자로 근대 질서에 편입했으나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실향민의 삶과, 고령화로 실업의 위기에 노출된 도시인의 불안을 보여준다. <하녀>(1960, 김기영)와 같은 작품은 산업화와 더불어 시작된 여성의 노동 체험과 유급 노동의 장소로 변화되는 사적 영역을 그렸다.

산업화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1970년대 노동 공간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 박광수), <노가다>(2005, 김미례), <위로공단>(2014, 임흥순)과 같은 영화에 담겼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다루는 청계천은 불법 노동이 강요되는 공간인 한편 근로기준법이 담긴 노동서가 판매되는 이중적 공간이다. 이 영화는 십대 초반의 어린 여공들이 비인간적인 노동환경에서 겪는 현실을 바탕으로 한다. 태일(홍경인 분)은 법규가 준수되지 않는 왜곡된 현실을 비판, 법전을 태우고 분신하는데, 이는 관료주의에 잠식되어가는 엘리트에 대한 비판의 의미를 갖는다. 동시에 영화는 전태일의 삶을 기록하고 그와 노동자 아내를 동일시하는 엘리트 영수(문성근 분)를 통해 한국 사회의 엘리트주의를 재승인하고 있다. <노가다>와 <위로공단>은 노동자의 자손이 예술가로 성장하여 부모 세대의 삶을 반추하는 다큐멘터리이다. <노가다>는 일용직 노동자의 밑바닥 삶을 보여주었고, <위로공단>은 1970년대 구로공단에 젊음을 바쳤던 노동자의 투쟁과 일상을 그렸다. <위로공단>은 한국 최초로 베니스 비엔날레(2015)에서 은사자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는 역사적 시공간을 가로질러 오늘날 신자유주의 하에서 전지구화된 억압적인 여성의 노동 현장을 다룬다. 콜센터 직원, 마트 계산대 직원, 캄보디아의 한국인 소유 다국적 공장에까지 범위를 확대하여 노동 현실을 추적하는 것이다. 그것은 계급적, 젠더적으로 이중 타자화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전태일의 서사가 한국노동사에서 남성의 헌신이 필요한 어리고 연약한 여성을 영상화한다면 이 영화는 노동운동사에서 여성이 적극적으로 발화했던 동일방직과 YH 여공 사건에 주목한다.

1970년대 도시 공간은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농촌 인구의 노동력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대도시에 유입된 남녀 노동자들은 도시의 하층민이 되었다. <모범운전사 갑순이>(1972, 이형표), <도시로 간 처녀>(1981, 김수용)는 확장된 도시 공간을 연결하는 운수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를 그린다. 이 가운데 <도시로 간 처녀>는 버스 안내양의 노동 현실과 계급 상승을 위한 노력을 다루고 있다. 당시 버스 안내양은 노동 처우가 가장 열악한 저임금의 직업군이었다. 그러한 현실은 안내양의 삥땅을 관행처럼 여기게 했으며, 사측 고용자나 운전기사도 뇌물을 받고 그것을 눈감아주는 식으로 비리가 만연했다. 그러나 여주인공 문희(유지인 분)는 도덕과 양심을 어기는 행위를 단 한 번도 하지 않는 성격과 품행의 소유자이다. 회사 측에서 삥땅 문제를 일소하려고 알몸 수색 같은 인권 유린을 자행하자 그녀는 동료들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며 버스회사 옥상에서 투신을 시도한다. 이 영화가 그리는 노동 공간은 부도덕과 비리로 얼룩진 현장이다. 이는 상위계급의 부정부패와 하위주체들의 그것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타협적 결론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안내양이 버스를 타고 다니는 일상에 언뜻언뜻 드러나는 서울 대로변의 풍경은 그 시대의 역사적 기록물로서 가치가 있는 재현이라 하겠다. <영자의 전성시대>(1975, 김호선)는 여성 노동자가 성매매여성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의 중간단계로 버스 안내양의 현실을 그린다. 영자(염복순 분)는 식모, 공장 노동자, 호스티스를 거쳐 버스 안내양이 되는데 버스의 곡예운전과 개문발차 상황에서 한쪽 팔을 잃게 된다. 이러한 사고는 당시 안내양에게 예외적인 현실이 아니었다. 영화는 영자의 안내양 시절을 가장 어둡고 푸르스름한 빛깔로 재현한다. 그만큼 저임금, 장시간 노동, 사고 위험성으로 악명이 높은 직종이었던 것이다.

<영자의 전성시대>에서 영자의 순수했던 시간을 기억하는 목욕탕 때밀이 창수(송재호 분)는 남성 하층 계급의 삶을 재현한다. 그는 지하 보일러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재봉기술을 배워 중산층에 편입하려는 계획을 가졌다. 그는 성병을 치료하고 나서 자신의 직장인 목욕탕에 영자를 초대하고 그녀 몸의 때를 밀어준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영자의 오염된 육체가 건실한 꿈을 꾸며 살아가는 창수의 짝으로 적절치 못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영자는 이별을 결심하고 흐느껴 울면서 도심을 헤매다가 중앙청을 올려다보는데 연출진은 이 장면에 구조적 모순에 의한 사회 비극으로 그녀의 삶을 조명하려는 의도를 담았다고 한다.

<칠수와 만수>(1988, 박광수)는 빌딩 간판과 신축아파트의 도장(塗裝)을 하는 하층민의 삶을 그린다. “숨 쉬는 것 빼곤 모두 구라”인 가짜 미대생 칠수(박중훈 분)는 연좌제에 묶여 사회생활에 제약을 받고 자폐적이 된 만수(안성기 분)의 조수가 되어, 빌딩 꼭대기에서 개발이 완성단계에 이른 반포의 아파트 숲을 내려다보며 일한다. 비루한 인물들이 중산층의 생활공간에 조감(鳥瞰)의 시선을 던지는 공간적 전도는 한국 사회를 역상(逆象)으로 투시하려는 의욕의 산물이다. 민주항쟁 이후 억압되었던 사회적 불만이 폭증하면서 빌딩 옥상은 하층민들이 목숨을 걸고 부조리에 맞서 항거하는 공간이 되었다. 현실 고발과 탈주 행위가 만나는 이 공간에서 이들은 서로 다른 행각을 보인다. 칠수가 연행되는 한편 만수는 투신을 선택하는 것이다. 옥상 공간의 의미를 미담(美談)의 현장으로 축소했던 <도시로 간 처녀>와 달리 <칠수와 만수>는 프리즈 장면으로 비판 의식을 끝까지 유지하는 만수를 재현한다.

<구로아리랑>(1989, 박종원)은 공장에 위장취업한 대학생 현식(이경영 분)이 지도자로 선출되어, 투쟁을 이끌어가는 서사를 통해 1980년대 운동권 학생이 노동계로 진출, 노동운동의 새로운 장을 열어갔던 사건을 재현한다. 구로공단의 봉제공장이 배경이 되었는데 영화에 재현된 공장은 여성이 남성 노동자에 의해 이중으로 타자화되는 곳이다. 이는 신분을 숨긴 사장 아들과 동거했던 미경(윤예령 분)의 자살로 구체화되고, 이 사건은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투쟁에 나서게 하는 도화선이 된다. <파업전야>(1990, 장산곶매)는 세계노동절 101주년 기념영화로 제작되었다. 1980년대 노동 문제와 사회 모순을 집약한 재현으로 영화의 선동적 힘을 효과적으로 보여준 영화이다. 상영을 저지하려는 당국의 탄압으로 대학가에 상영 투쟁이라는 진풍경을 낳기도 했는데, 이 작품이 그리는 공장과 그 주변은‘반독재민주화’와‘노동해방, 노-학 연대의 공간’으로 나타난다(이성철, 이치한, 2011:237).

<카트>(2014, 부지영)는 정규직과 비정규직(non-regular worker)으로 이분화된 노동 현실을 고발한다. 결혼과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을 극복, 정규직이 되고자 노력하는 계약직 선희(염정아 분)와 싱글맘 혜미(문정희 분)의 일상과 투쟁을 다루고 있다. 이들이 싸우는 공간인 대형마트 홈에버는 고용주의 약속이 손쉽게 폐기처분되고 노동자 해고가 일상화된 곳이다. 또 고용자의 회유, 공권력 동원, 용역업체의 폭력이 난무하는 곳이다. 이는 한국 사회에 노동 문제가 처음 제기되었던 1970년대와 비교하여 달라진 것이 거의 없는 모습이다. 달라진 것은 재현 과정에서 대체로 여성이었던 핍박받는 노동자가 오늘날은 비정규직이 되어 더욱 열악해진 현실과 마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적 타자로서 여성의 위상이 노동자 현실을 여전히 대변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 사회가 계급과 젠더 양측에서 개선해야 할 숙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참고문헌>
서영애, 조경진, 「영화 배경으로서의 도시 공간의 특징과 의미 해석」, 『한국조경학회지』, 34(1), 2006.
이성철, 이치한,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영화가 노동을 만났을 때』, 호밀밭, 2011.

작성자: 진수미(서울시립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