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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영화적 재현
  분류 : 한국의 도시영화
  영어 : Youth movie
  한자 : 靑春 都市 映畵


도시는 무차별적 공간이 아니다. 도시의 특정 시설은 세대, 성, 직업, 지적 능력과 같은 기준으로 해당 장소에 적합한 인물 군(群)을 선택적으로 수용한다. 선택된 이들이 모인 장소는 자연, 구성원과 관련된 특성을 지니기 마련이다. 예컨대 젊은이들은 도시의 어두운 뒷골목에 모여든다. 영화는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외모를 지닌, 반항적 젊은이를 사랑해 왔다. 소위 청춘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들이 그러할 터인데, 그 목록을 꼽아보자. <청춘의 십자로>(1934, 안종화), <청춘행로>(1949, 장황연), <청춘쌍곡선>(1956, 한형모), <청춘교실>(1963, 김수용), <맨발의 청춘>(1964, 김기덕) 등이 떠오른다. 이들은 미숙한 열정이지만 이를 통해 기성세대에 저항하고 순수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청춘기의 특성을 담고 있다. 이러한 청춘영화 내부에 새로운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했던 때는 1970년대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대학 공간이 있었다.

1970년대 초반 청바지, 생맥주, 통기타를 앞세운 대학가 새로운 일상이 문화의 전위에 나타났고, 앞선 시대의 관행처럼 기성세대는 이를 퇴폐적이라 비판했다. 이전 영화의 예를 들면 <자유부인>에서 대학교수 태연(박암 분)은 동네 청년 춘호(이민 분)가 대학생이면서 공부를 도외시한다는 이유로 비판의 시선을 보냈고, 1960년 4.19 혁명에 이르러서 청년 세대가 급부상했지만 대학생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는 여전했고, 잇달아 5.19 쿠데타가 발발하자 영화는 국가 재건을 위해 새사람이 되어야 하는 당위적 주체로 대학생을 호명(한영현, 2011:34~36)했던 것이다. 그러나 68혁명과 우드스탁 페스티발, 반전시위와 같은 세계사적 흐름에서 볼 때 비록 표피적인 수용이라 할지라도 1970년대 청춘군상의 움직임에는 새로운 가치를 부여할 만한 요소가 있었다. 한완상은 1970년대 청년문화의 특성을 인텔리겐차의 주도성과 대항 문화적 요소에서 찾았다(허수, 2009:370-371). 일본영화의 비공식적 수용으로 이루어진 1960년대 청춘영화도 저항성을 내포했지만 엘리트적 요소가 두드러지지 않았다면, 한국 대학생의 생활양식을 담은 1970년대 청년영화는 대학생의 정체성 속에서 대학이라는 공간을 영화 재현의 주요 무대로 설정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보들의 행진>(1975, 하길종)이다.

신촌 대학을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은 타이틀 롤에, 배우들의 소속 대학교를 명시하여 대학생 영화로서 정체성을 부각하고 있다. “우리는 바보예요, 바보, 병신, 쪼다, 여덟 달 반이에요”라고 언표화되는 영철(하재영 분)의 자학은 시대의 폭력 속 무기력과 우울 증세를 보일 수밖에 없었던 청년세대의 고통스런 내면이 투영된 것이다. 이 영화는 유신체제 하의 모순과 억압 아래 “치욕에서 벗어나려는 청춘의 몸부림”을 재현함으로써 대중의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이는 미팅, 막걸리 대회와 같은 대학생의 일상과 풍속도를 섬세하게 그린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다(이상용, 2013:116~7). 한편 <바보들의 행진>은 스타일에서도 독특한 면모를 보여 한국 영화사의 걸작 반열에 올랐다. 장발 단속 시퀀스에서 영철과 병태(윤문섭 분)는 경찰을 피해 거리를 달리는데 이들의 거친 호흡에 맞춰 질주하는 영상의 감각성은 오늘의 시선으로 보아도 파격적이다. 이들이 육교를 뛰어오를 때 카메라 앵글을 180도 회전시켜 자동차가 거꾸로 매달려 달리는 차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보편적 가치가 전도되고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의 모순 속에서 동요 없이 살아가는 당대인을 풍자하는 신으로 읽힌다.

유신체제 하에서 청년문화는 제대로 만개할 수 없었다. <바보들의 행진>은 검열의 가위질 속에서도 청년 특유의 경쾌함과 저항성이 배어나오는 결과를 보여주었으나 이는 평지돌출처럼 예외적인 성취에 속했다. 이 영화가 나온 1975년은 다양한 문화형식이 부상하고 대중의 호응을 얻었던 시기였다. 이후 검열을 통한 유신체제의 본격적인 문화 개입으로 대중의 문화적 욕구는 좌절되었고, 그 결과 청년문화는 1976년 이후 하강세에 접어들기 시작했다(주창윤, 2007:20). <겨울 여자>(1977, 김호선)는 청년문화가 어떠한 방식으로 하강 곡선을 그리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영화계는 유신체제의 선전도구 역할을 수행하는 한편 성애를 다룬 퇴행적 호스티스 멜로드라마를 생산하는 상업 전략을 펼치기 시작했다. <겨울여자>는 신촌의 여자대학과 동명을 지닌 여대생의 이야기이다. 이화(장미희 분)는 대학에 입학한 후 세 명의 남자를 만나고 두 명의 남자와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성관계를 맺는다. 이 가운데 대학생 석기(김추련 분)가 연애 파트너로 등장하는 중반부는 대학이 미장센의 주요 요소가 된다. 요섭(신광일 분)과 석기 에피소드의 브리지 역할을 하며 등장하는 대학은 텅 빈 강의실과 복도, 데모를 암시하는 구호, 최루탄 발사음과 같은 사운드와 이미지로 제시된다. 이 장면은 흑백으로 처리되어 음산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는 10월 유신 이후 대학이 처한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이 시기 대학의 상황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미장센은 닫힌 교문이다. 석기와 이화가 굳게 닫힌 교문의 창살을 붙잡고 들여다보는 텅 빈 교정은 젊은이의 불온성과 자유가 살아있는 해방 공간으로 대학을 형상화한다. 휴교령이 내려지자 석기는 군대로 떠나고 주검이 되어 돌아온다. 이화가 세 번째 남자를 만나게 되면서 영화의 주요 공간은 그의 아파트로 바뀐다. 이 공간 변화는 청년세대의 문화를 다루던 영화가 호스티스 영화로 변질되는 하나의 신호처럼 여겨진다. 많은 연구자들이 이화를 1970년대 중반 등장한 성매매여성의 범주에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김경․황혜진, 1999: 33~34). 1970년대를 대표하는 흥행작 <겨울여자>는 청년문화가 성을 중심으로 한 향락문화로 변화되는 과도기의 산물이다.

<병태와 영자>(1979, 하길종)는 <바보들의 행진>의 속편이다. 전편에서 군대에 갔던 병태(손정환 분)가 제대하고 복학생이 되면서 대학은 자연스럽게 영화의 중심이 된다. 그러나 시간의 변화를 수용한 이 영화에서 서사의 동력이 되는 것은 졸업식이다. 영자의 졸업식에는 집안에서 결혼을 약속한 상대 주혁(한진희 분)이 참석한다. 먼발치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다 도망가는 병태를 발견하고 영자는 그를 따라나선다. 이들이 향한 곳은 전편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영철(하재영 분)의 무덤이다. 영자와 병태는 그를 추모하면서 학사모를 영철의 묘석에 씌운다. 관제화된 졸업식을 거부하고 민주졸업식을 선택했던 1980년대 대학의 졸업식을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이 신에서 영철은 꿈을 위해 자신을 불사르는 젊음의 상징, 후일 386세대라 불리게 되는 대학생 집단을 예비하는 존재로 재현된다. 이후 병태는 대학 도서관에서 공부하면서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지만 영자의 약혼식 소식을 듣고 사랑하는 여성을 얻기 위해 거리로 달려 나간다. 이윽고 병태의 졸업식이 거행되는데 이는 청춘의 졸업식을 의미한다. 같은 날 병태와 영자는 부모가 됨으로써 청춘의 드라마가 일단락되는 것이다.

1980년대 대학은 한국 사회의 헤게모니 구조를 바꾸기 위한 저항 운동의 본산이 되었다. 그러나 대학을 미장센으로 운동권 대학생을 직접 다룬 영화는 드물다. 이들은 대개 노학연대 속 노동자의 모습으로 영화에 등장하는 것이다. <숲속의 방>(1992, 오병철)에서는 민주화운동에도 중산층의 속물적 삶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대학생 소양(최진실 분)의 모습과 함께 대학가 데모 장면이 구체적으로 재현되었다. 강의실에 난입해 학생을 연행하는 경찰, 스타디움을 빼곡히 채운 데모대, 최루탄이 자욱하게 깔린 교정은 1980년대 대학을 재현하는 대표적 미장센인 것이다. 이와 더불어 주차장에 즐비한 중산층 학생들의 승용차도 같은 시대, 대학 공간을 구성했던 미장센이었다. 소양은 이 두 극단 사이에서 방황한다. 그녀가 데모를 선택한 무리에서 소외감을 느낄 때 영화는 대학생의 문화적 획일주의를 비판하며, 그녀가 중산층 친구들과 어울릴 때 영화는 대학생의 향락문화와 속물근성을 비판한다. 선택지가 대립적인 두 항밖에 주어지지 않았던 1980년대 문화의 경직성 속에서 영화 역시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대학은 청춘남녀의 아련한 시절을 그리는 첫사랑 영화를 통해 재현된다. <겨울 나그네>(1986, 곽지균),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배창호), <건축학 개론>(2012, 이용주)이 그 예이다. 대학을 상징했던 저항 문화는 화염병이라는 사물로 축소된다. <칠수와 만수>(1988, 박광수), <괴물>(2006, 봉준호), <파주>(2009, 박찬옥)에서 화염병은 대학생이 중심이 되었던 변혁 운동의 불온함과 저항성을 환기하는 사물로 기능한다. 대학이라는 공간의 특성은 영화의 정체성에 독특한 색깔을 입혀 왔다. 그것은 먼저, 대학생의 사회적 위상과 관련된다. 이들의 도덕적 책무를 간접적으로라도 표상하게 됨에 따라 헤게모니 세력에 대한 저항의식이 여타의 청춘영화에 비해 강조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대학이라는 공간이 한 개인의 역사에서 청춘의 어느 순간을 통과했다가 떠나는 임시적 장소라는 점이다. 따라서 대학을 미장센으로 하는 영화는 졸업 후의 생활공간과 연속되어 등장인물의 변화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예로 시인 윤동주의 삶을 그린 <동주>(2015, 이준익)를 들 수 있다. 이 영화는 동주(김하늘 분)와 그의 사촌 몽규(박정민 분)가 함께 다닌 연희전문대학과 이들의 하숙집을 배경으로 한다. 1940년대 대학가는 한국 영화사에서 거의 재현되지 않았던 시공간이다. 이 미장센은 졸업식 신(scene)으로 연결되어, 친일인사가 된 민족지도자를 비판하는 장면을 낳는다. <동주>에서 오늘날 신촌이라 불리는 대학가는 인물들이 성장했던 유소년 공간을 벗어나 더 넓은 세계로 향하게 하는 통과역처럼 등장하지만 동시에 이 시기 지식인 청년의 정신세계를 읽을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영화는 흑백화면으로써 암울한 회색지대를 통과할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청춘의 비극적 초상을 연출하고 있다.


<참고문헌>
김경․황혜진, 「한국 멜로드라마의 변화와 수용」, 유지나 편, 『멜로드라마란 무엇인가』, 민음사, 1999.
김봉석, 「겨울여자」, 한국영상자료원 편, 『한국영화 100선』, 한국영상자료원, 2013.
허수, 「1970년대 청년문화론」,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편,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2』, 역사비평, 2009.
한영현, 「4.19 혁명과 1960년대 초반 영화에 반영된 ‘청년’의 형상」, 『영상예술연구』, 제22호, 2013.
주창윤, 「1975년 전후 한국 당대문화의 지형과 형성과정」, 『한국언론학보』, 51호, 2007.

작성자: 진수미 (서울시립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