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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구스(요새)
  분류 : 서양도시사
  영어 : Burgus
  한자 : 要塞


부르구스는 요새(fort)를 뜻하는 라틴어로 고대 로마 시대 말기부터 사용되었다(Timothy Darvill, 2008: 63). 이후 프랑스어의 부르(bourg), 독일어의 부르크(burg) 그리고 이탈리아어인 보르고(borgo)가 라틴어 부르구스에서 파생되었다. 
 
중세 초기에 부르구스는 군사적 방어 체계가 갖춰진 도시(civitas: city)의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존재하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군사적 방비가 갖춰져 있지 않은 공간을 의미했다. 중세 초기 대부분의 부르구스는 도시수도원 및 교회 근처에 있던 거주 지역으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지 않았다. 외부의 공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공간 구조였다(David Nicholas, 2014: 27-8).

부르구스의 공간 형태는 9세기가 되면서 바뀐다. 혼란스러웠던 서유럽의 정치·사회 상황에 따른 변화였다. 9-10세기 서유럽은 외부 세력의 침략에 노출됨에 따라 혼돈의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북쪽에서 바이킹이 동쪽에서 마자르족이 서유럽의 여러 지역을 침략하여 노략질을 일삼았다. 남쪽에서는 이슬람 세력이 기독교 세계를 위협하고 있었다(이연규 역, 145-50). 외부 세계로부터의 침략과 함께 서유럽 내부에서도 안정적인 상황을 무너뜨리는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서유럽 대부분 지역을 통치하던 카롤링거 왕조가 9세기 중반 이후로 권력의 구심력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권력은 분화되어 봉건 영주들이 각 지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강력한 힘을 갖는 중앙집권적 통치 권력이 사라지고 분권화된 권력 구도 속에서 다수의 세력이 경쟁하고 충돌했다. 서유럽을 폭력과 무질서가 팽배한 사회로 몰아갔다. 다시 말해 9-10세기 서유럽은 바이킹, 마자르족, 무슬림들과 같은 외부 세력의 침략과 위협에 놓여있었고 동시에 내부적으로는 분화된 권력 구도 속에서 봉건 영주들 사이에 크고 작은 전쟁이 빈번히 일어나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이와 같은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각 지역 단위는 군사적 방어의 중요성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에 부르구스도 군사적 방어를 목적으로 성벽을 쌓아 올렸다. 성벽 밖에 해자(moat)를 설치함으로써 성벽의 방어 기능을 강화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원형의 공간 중간에 아성(牙城, keep)을 세웠다. 아성은 성벽이 적에게 뚫렸을 경우 최후의 보루가 되어 줄 방어 수단이었다. 아성 외에도 영주의 주거 공간과 예배당 및 곡물창고와 지하저장고 등이 있었다. 부르구스의 수비는 영주와 봉건적 주종관계에 있던 기사들이 번갈아 상주하면서 담당했다. 한편 성벽의 유지·보수는 영주의 통치하에 있는 농노들의 노역을 통해 이루어졌다(Henri Pirenne, 71-4).

부르구스는 기본적으로 군사적 방어물로 기능했으나 행정·통치의 중심지 역할을 맡기도 했다. 10세기 경 부르구스의 통치자인 영주는 부르구스뿐만 아니라 인근 주변에 대한 경제적·사법적 권한을 행사했다. 또한 부르구스는 적에게 침략 당했을 때 인근에 사는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었으며, 평화 시에는 사법적 문제 및 봉건적 의무와 관련된 사항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소가 되었다.

하지만 부르구스를 도시라고 볼 수는 없다. 부르구스는 근본적으로 요새였기 때문에 그곳에 거주하는 이들은 기사들과 성직자 그리고 그들을 지원하는 소수의 사람들뿐이었다. 따라서 부르구스에서는 상업 활동이나 생산 활동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런 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도 조성되지 못했다. 부르구스는 인근 지역에서 거둬들인 수입으로 경제생활을 영위하는 소비지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구스가 도시사(都市史)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Henri Pirenne, 75-6). 서유럽에서 상업 및 수업공 활동이 부활하면서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부르구스 주변으로 모여들어 도시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외부의 적이 공격했을 때 부르구스가 그들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다는 기대감이 부르구스 인근에 도시가 형성된 이유다.  


<참고문헌>
Timothy Darvill, Oxford Concise Dictionary of Archaeology, 2nd ed. (Oxford an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8).
David Nicholas, The Growth of the Medieval City: From late Antiquity to the Early Fourteenth Century (New York: Routledge, 2014),
이연규 역, 브라이언 타이어니/시드니 페인터 저 『서양 중세사: 유럽의 형성과 발전』 (집문당, 1997).
Henri Pirenne, Medieval Cities: their origins and the revival of trade, 3rd ed.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4)

작성자: 이상동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