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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
  분류 : 디지털도시성
  영어 : Anthropocene
  한자 : 人類世

  인류세(anthropocene)인류라는 의미의 ‘anthropos’최근의혹은 새로운이라는 의미를 지닌 ‘cene’이라는 단어들의 조합으로, 지질학적으로 지구의 상태가 인류에 의해 좌우되는 역사상 최근의 시기를 가리킨다. 사실 ‘anthropocene’ 자체로는 최근의(새로운) 인류라는 뜻이 되고 인류세의 ‘-’()‘epoch’의 번역어이므로, 우리가 흔히 인류세라고 할 때에는 ‘anthropocene epoch’를 뜻하는 것이다. 인류세라는 개념은 인류가 화석연료를 연소하여 배출한 탄소, 대규모 숲의 파괴, 플라스틱의 과도한 사용 등의 결과로 지구의 지층 표면 혹은 대기권까지 심각한 영향을 미쳐 그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기 어려울 정도로 변화한 현재의 지질학적 상황을 가리키기 위한 용어로, 2000년 네덜란드의 대기과학자 폴 크뤼천(Paul Crutzen)이 처음 제안한 것이다.

 많은 과학자들은 1만년 동안의 온화하고 기후변화가 덜했던 홀로세(Holocene)가 끝나고, 20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인류세라는 새로운 지질학적 시기로 접어들었다고 본다. 물론 그 기점이 20세기 중반인지 18세기 산업혁명의 시기인지는 과학자들마다 상이하게 판단하고 있으며, 또 그 원인으로 보는 사건도 다양하다. 과학자들은 이제 인간의 능력이 지표면뿐만 아니라 지구 전체의 생태계를 변화시키고 파괴할 정도로 강력해졌다고 본다. 머지않아 지구나 대기권 내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은 지구 바깥의 영역에까지 급격한 행성 차원의 변화를 야기할 정도로 인류의 힘은 강력해졌다. 인간이 속한 지구 시스템 전체(대기, 토양, 수역, 생물권 등)의 파괴로 이어질 정도로 우리는 문자 그대로 신기원[()]를 여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류가 일으킨 변화의 규모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최근 몇 십 년 동안 우리는 지구가 45억 년 역사에서 경험한 것을 능가하는 수준으로 세계를 바꾸었다. 지구는 지질 시대의 경계를 넘는 중이고, 인간은 그 변화의 주동자이다”(빈스, 2018: 15). 인류세는 그 변화의 주동자들이 바로 인간이며 그 변화로 인해 소멸할 것도 바로 인간 자신이라는 점에서 어떤 역설을 지닌다.

 지구가 생성된 지 46억 년, 지구상에서 생명이 탄생한 지 5억 년, 현생 인류가 출현한 지 110만 년이라는 장구한 우주적 시간 속에서, 고작 1백년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인류는 지구의 총체적 환경 시스템을 붕괴시킬 정도로 맹목적으로 개발과 소비에 몰두해왔다. 특히 최근의 기후변화, 나아가 기후위기의 현상들은 지금의 시기를 인류세라 칭할 정도로 광범위하고 무분별하게 이루어진 인류에 의한 환경 파괴에 대한 지구시스템의 대응 혹은 역습이라고 이야기된다. 따라서 인류세의 담론이 제기하는 문제는 지금의 이 전 지구적 기후 및 환경의 위기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임은 단순히 그것을 일으킨 당사자, 즉 인류에 대한 단죄나 후속처리의 요구와 같은 도덕적 혹은 윤리적 해결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그 책임의 당사자가 인류 전체라고 에둘러 논하는 것도 사실상 무책임한 일이다. 그야말로 인류 전체의 책임인지, 지구 환경을 파괴한 물질(화석연료, 탄소)의 책임인지,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그와 같은 맹목적인 전 지구적 개발을 가능하게 한 제도(자본주의)적 책임인지, 그도 아니면 내연기관과 같은 기계의 발명과 그에 따른 산업 기술의 진보 때문인지, 어느 요인에 그 책임을 물을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어느 것도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이 모든 인류세 현상의 배후에 자리하는 원인에 대한 논의에서부터 인류세의 논자들은 종종 시작한다. 이는 곧 인류세라는 지질학적 시기의 명명에 대한 문제와 이어지는데, 논자들의 입장이나 관점에 따라 인류세라는 명칭보다는 탄소나 자본의 전 세계적 악영향이 근본 원인이라고 보는 탄소세나 자본세(Moore, 2016)부터, 자본주의적 혹은 식민주의적 착취구조나 SF적 상상력을 통한 형상을 떠올리게 하는 대농장세나 툴루세(해러웨이, 2019)까지 언급되기도 한다.

 하지만 다양한 인류세의 담론들의 비판적 시각은 대체로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를 향한다. 자연을 정복하고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 되어 왔던 근·현대 시대를 지탱해오던 사유, 제도, 및 기술에 대한 전면적인 반성을 내포한다. 그렇기에 인류세와 인류세를 둘러싼 담론이 제기하는 문제는 인간 대 비인간, 정신 대 물질, 문화 대 자연과 같은 근대의 이원론적 사고방식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 및 비판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한 쪽(즉 인간)의 권능이 근원적이거나 우월하다고 보는 이원론적 방식으로는 인간과 지구상의 생물들을 포함한 지구 환경 전체의 파괴로 이어지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사고를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초 모든 인류세 담론이 인간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사유한다 하더라도 실질적인 해결책을 찾아내는 데에서는 다시 입장이 나눠진다. 궁극적으로 인류가 초래한 전 지구적 위기 상황이지만 이를 해결해야할 주체도 인류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편에서는 지구의 역량만큼이나 강력해진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현재 지구의 위기를 관리하고 무너진 밸런스를 다시 회복할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이 힘을 얻고 있다. 다보스 포럼에 모인 각국의 지도자들이나 거대 기업의 대표들은 인류의 능력(예컨대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인류세의 위기를 극복할 것으로 기대하거나 그럴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더 이상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며 지구의 주인이라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지금의 시스템적 위기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관점을 제기한다. 인간의 자연에 대한 막강한 우위와 영향력을 부정하고, 인간의 능력을 자연, 비인간, 혹은 물질의 역량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며, 나아가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 사이의 역동적이고 이종적인 네트워크 속에서 지구 환경과 인류의 미래를 고려할 것을 주장한다.

 인류세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근본적인 가르침은 인류세는 이원론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재확인하기도 한다”(해밀턴, 2018: 140)는데 있다. 인류가 자연과 지구 시스템에 얽매여 인간 자체의 행위성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동시에 극대화시키기도 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류세를 마주한 인류의 과제는 주체와 객체, 인간과 자연의 구분을 무화하는 것에 있다기보다는 극대화된 주관성, 즉 인간의 능력에 대한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참고문헌:

가이아 빈스, 김명주 옮김, 인류세의 모험, 곰출판, 2018.

김상민·김성윤, 물질의 귀환: 신유물론의 관점에 따른 인류세 담론 비판, 문화/과학97, 2019.

도나 해러웨이, 김상민 옮김, 인류세, 자본세, 대농장세, 툴루세: 친족 만들기, 문화/과학97, 2019.

클라이브 해밀턴, 정서진 옮김, 인류세: 거대한 전환 앞에 선 인간과 지구 시스템, 이상북스, 2018.

Paul Crutzen and Eugene Stoermer, The ‘Anthropocene’, Global Change New Letter, No. 41, 2000: 17-8.

Jason W. Moore (Ed.), Anthropocene or Capitalocene?: Nature, History, and the Crisis of Capitalism, PM Press, 2016.

 

작성자: 김상민(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