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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유토피아
  분류 : 유토피아 및 공동체
  영어 : Disaster Utopia
  한자 :

재난 유토피아(Disaster Utopia)는 재난 상황에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연대하고 돌봄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형성되는 유토피아를 가리킨다. 이 개념은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A Paradise Built in Hell: The Extraordinary Communities That Arise in Disaster(2009)에서 본격적으로 제안한 것으로, 지옥(Hell) 속에 세워진 유토피아(Paradise)라는 역설적 공존에 주목한다. 이때, 재난은 단순히 파괴와 고통의 시간이 아니라, 기존 질서가 잠시 중단되는 틈새에서 공동체적 가능성과 실천이 활성화되는 시간으로 재정의된다.

솔닛은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에서부터 2005년 뉴올리언스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재난 사례를 분석하면서 재난의 한복판에서 반복적으로 출현하는 상호부조와 연대의 경험을 발굴해낸다. 예컨대 1906년 대지진 당시, 중년 여성 홀스하우저가 자발적으로 연 무료 급식소는, 이후 미스바 카페(Mizpah Café)’로 불리며 재난 생존자들이 서로를 위해 요리하고 돌보는 자발적 공동체의 거점으로 기능하게 된다.(솔닛, 2012:28~34) 흔히 재난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무질서와 폭력, 약탈이 난무할 것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이 즉흥적으로 구조 활동을 벌이고 대피소와 공동체를 형성한다.”(솔닛, 2012:32) 그곳에서 낯선 사람들은 협력자가 되고, 자원을 공유하며, 새로운 역할을 떠맡는다. 이는 재난이 물리적 지옥수도 있지만 동시에 일종의 사회적 유토피아아와 같은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솔닛, 2012:167)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적 가능성은 종종 제도권 권력에 의해 억압된다. 솔닛은 이를 엘리트 패닉(elite panic)”(솔닛, 2012:64)이라 명명하며, 재난 상황에서 정부와 엘리트 집단이 시민을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하고 군대·경찰·언론을 동원해 시민들을 통제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실제로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당시, 시민들의 자발적 구조 활동을 무법 행위로 간주하여 억압한 사례가 있었다. 무엇보다 이런 과잉대응은 시민들이 기존 질서 없이도 사회를 유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두려워한 데서 비롯되며, 이는 재난이 가진 전복적 측면을 가시화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재난은 혁명과 유사한 성격을 가진다. “재난과 혁명, 이 두 현상은 불확실성, 가능성, 평소에 가동되는 체제들의 전복 같은 측면들을 공유”(솔닛, 2012:242)하기 때문이다. 솔닛은 가장 중요한 것은 재난의 파괴적 힘, 말하자면 기존 질서를 뒤집고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능력”(솔닛, 2012:32)이라고 강조한다. , 재난은 기존 질서를 중단시키며 현재의 삶과 체제의 근본적 문제를 되돌아보는 계기이자 새로운 행동을 일으키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문강형준, 2012:24) 이 과정에서 우리는 다른 삶과 사회를 상상할 기회를 마주하게 된다.

결국, 재난 속에서 무엇을 읽어내고자 하는가는 정치적 상상력의 문제다. 나오미 클라인이 재난 자본주의를 통해 재난을 위로부터 작동하는 통치 전략으로 해석했다면, 솔닛은 아래로부터 솟아오르는 유토피아적 가능성에 주목했다. 특별히 주목할 점은, 이러한 공동체적 연대가 단지 이상에 그치지 않고 실제 역사 속 재난 상황을 통해 반복적으로 실현되어왔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재난 유토피아는 비현실적 낙관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검증된 근거 있는 가능성이다. 이는 파국의 순간에 드러나는 인간 본성의 또 다른 얼굴이자, 기존 체제가 멈춘 틈새에서 체제 바깥의 삶을 사유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문이다. “재난은 그 자체로는 끔찍하지만 때로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뒷문이 될 수 있다”(솔닛, 2012:13)는 단언처럼, 인간의 선한 본성과 공동체적 가능성에 대한 기억과 믿음이야말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실천적 힘으로 전환될 수 있다.

오늘날 재난이 일상이 된 시대에, 재난 유토피아는 더 이상 예외적 현상이 아니다. 위기 속에서 더 나은 사회와 공동체를 모색하려는 윤리적·정치적 자원으로서 폭넓게 사유되어야 한다.

 

 

참고문헌

레베카 솔닛, 정해영 옮김, 이 폐허를 응시하라 대재난 속에서 피어난 혁명적 공동체에 대한 정치사회적 탐사, 펜타그램, 2012.

나오미 클라인, 김소희 옮김, 쇼크 독트린 자본주의 재앙의 도래, 살림Biz, 2008.

문강형준, 재난인가? : 재난에 대한 이론적검토, 문화과학72, 문화과학사, 2012년 겨울호.

 

 

작성자: 김혜선 (한양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