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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의 공간(들뢰즈의)
  분류 : 공간철학
  영어 : L‘Espace de Devenir(Space of Becoming)
  한자 :


우리가 공간에 관해 생각할 때, 흔히 물질을 담은 용기(container)나 모든 것이 변해도 변치 않은 근거와 같은 상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들뢰즈(Gilles Deleuze)는 변화를 허용하지 않는 불변의 근거나, 미리 주어진 선험적인 형식, 패쇄적 체계로 공간을 생각하는 견해를 단호히 반대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공간은 닫힌 전체가 아니다. "전체는 주어질 수 없다. 전체가 주어질 수 없는 이유는 전체가 '개방성' (l'ouvert)이며 그 속성이란 끊임없이 변화하고 계속 새로운 것을 솟아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들뢰즈, 2002:24)

들뢰즈는 절대적 전체이자 닫힌 공간을 상정하는 이유가, 공간 밖에서 인식하는 항상적 부동의 관찰자를 전제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공간은 인식 주체를 기준으로 삼아 공간을 조직한다.

들뢰즈에게 공간은 기하학이 가정하는 질서와 이상적 법칙을 구현하지 않는다. 공간은 그 자체로 변화를 거듭한다. 공간을 규정하는 불변의 형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간은 온갖 사건이 끊임없이 생겨나며 차이가 결합하는, 강렬한 정동(affect)의 지대이다. 이러한 공간은 바람의 세기에 따라 모였다가 흩어지면서 무정형으로 모양을 달리하는 거대한 사막이나, 파도의 움직임에 의해 표면의 모양과 색깔이 시시각각 변하는 드넓은 바다의 이미지에 가깝다. 변이만이 있는 지속적 흐름과 생성, 이것이 들뢰즈가 제시하는 공간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우리가 감지하는 공간은 힘들의 결합과 해체를 감각하는 작용에서 비롯된다. 공간은 우리가 세계를 감각하는 것에 따른 효과이며, 우리가 감각하는 방식과 더불어 구성된 구조이자, 힘의 관계에 따라 변화하는 장(場)이다. 이러한 공간은 문법의 장, 사회의 구조, 문학의 공간과 같은 은유를 허용하기도 한다. 그로츠는 들뢰즈의 공간을 "이질적이며 다수적인 배치로서의 공간"(Grosz, 2001:51) 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공간을 칭하는 바깥(dehor)과 에레혼(erewhon)

들뢰즈는 다수의 저작에서 공간을 설명하며, 공간을 칭하는 용어 역시 다양하다. 그 중 바깥(dehor)이라는 개념은 사유 주체인 코기토와 합리적 법칙의 로고스 장막 아래서 꿈틀되는 '표현 불가능의 것'과 '사고 불가능의 것'으로 공간을 지시한다.

바깥은 주체의 현재를 형상하는 형식과 무관하며, 인식적 표상의 한계에서 벗어나 있다. 들뢰즈에게 있어서 바깥은 차이를 생성하는 실재적 강렬함이며 "힘들의 비정형적인 요소"(들뢰즈, 2003:74)의 생성이다. 바깥은 차이 그 자체가 꿈틀거리는 무바탕, 근거 지워질 수 없는 그런 의미를 지닌 세계이다. 바깥으로서의 공간은 동일한 것을 재현하지 않고, 항상 다른 것만을 출현하게 만든다. 들뢰즈는 이러한 바깥을 결코 도달할 수 없지만 근접 가능한 것으로 제안한다. 근접 가능성은 바깥이 통일성을 갖춘 전체로 파악 가능하지 않고, 차이 생성이 계속적으로 진행하는 상태임을 보여준다. 결국 바깥은 인간의 조건을 넘어서 있는 공간을 뜻한다. 바깥으로서의 공간은 처음과 끝이나 중심과 주변이라는 틀거리 없이, 어디에서나 이동 가능하며 변화할 수 있는 개방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바깥은 코기토로 파악 불가능한 지대, 어디도 아닌 곳(no where)인 에레혼으로 불리기도 한다. 에레혼(Erewhon)은 사무엘 버틀러(Samuel Butler)가 no where의 음절 순서를 뒤바꾸어 만든 조어로, <어디에도 없음>이자 <지금-여기>를 의미한다. 에레혼은 공간의 가장 큰 특징이 "위치를 바꾸고 위장 하며 양상을 달리하고 언제나 새롭게 재창조되는 '지금-여기'"(들뢰즈,2004:21)에 있다는 것을 제시한다.


들뢰즈의 공간 개념에 영향을 준 스피노자의 자연, 베르그송의 다양체

들뢰즈의 공간은 스피노자(B. Spinoza)의 자연과 베르그송(H. Bergson)의 다양체에 영향을 받았다. 스피노자가 설명하는 자연은 여러 개체들이 생겨나는 하나의 거대한 체계이다. 변화는 자연 그 자체가 지닌 특성이며, 그 원인은 자연 자체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자연으로부터, 공간을 모든 결합과 분리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운동이자 그 자체의 파괴와 생산을 작용의 원인으로 삼아 변용을 거듭하는 내재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내재적 공간 개념은 베르그송의 다양체 개념을 통해 공간 자체가 지닌 변이성의 의미가 보다 선명해진다. 베르그송은 다양성을 양적 다양체(multiplicité quantitative)와 질적 다양체(multiplicité qualitive)라는 두 유형으로 구별한다. 양적 다양체는 그 요소들이 수로 세어지고, 구별되며(distincte), 병렬될 수 있다. 이 다양체는 유클리드적 기하학 공간을 그 조건으로서 함축한다. 양적 다양체는 일(一)과 다(多)의 대립을 전제하며, 수는 하나의 '단위'(unit)로 등질한 것이다. 여기서 다양한 차이는 유사한 정도이자, 단위 간의 정도상의 간격을 의미한다.

질적 다양체에서 다양은 수로 세어질 수 없고, 양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질적 다양체에서 다양은 양화 될 수 없는 각기 다름이다. 이러한 이질적 차이의 관계맺음이 바로 다양체를 이룬다. 질적 다양체는 항과 항 사이의 집합 관계를 n차원으로 정의한 리만(G. F. B. Riemann)적 공간과 같다. 질적 다양체에서 "있는 것은 오로지 다양체의 변이성, 다시 말해서 차이뿐"(들뢰즈, 2004:398-399)이다. 차이들의 연결과 결합에 의해 질적 다양체는 변이를 거듭한다.

다양체 구분에 따르면, 양적 다양체는 유클리드 기하학이 연역적으로 도출한 공간을 설명한다. 이 공간은 양화 가능한, 위치들의 합 전체를 의미한다. 공간은 무한히 분할 가능하며, 나뉘어도 항상 동질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공간은 절대적으로 불변하는 곳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질적 다양체에서 공간은 전체 스스로를 창조하며 변이하는 흐름이다. 이는 "하나의 질적인 상태의 집합을 또 다른 집합으로 이끌어가는 그 무엇처럼, 또는 이 상태들을 거쳐 가는, 정지하지 않는 순수한 생성처럼 전체는 부분들이 없는 또 다른 차원 속에서 끊임없이 창조된다."(들뢰즈, 2002:25)

질적 다양체의 공간에서는, 유클리드 기하학적 거리 계량 방식은 통용되지 않는다. 기하학은 공간을 물질적 대상들의 세계가 지니는 위치적 성질로 이해한다. 양화적 공간은 물리적 거리를 두 위치 사이로 측량하며, 계량의 척도를 언제나 모든 관측자에게 동등한 불변의 법칙으로 가정한다. 이러한 측정은 공간 자체가 아니라 물리적 위치를 측량하는 것이다.

질적 다양체의 공간인 항들 사이의 거리는 불변의 위치를 지시하지 않는다. 관측자는 공간 외부가 아니라 공간에 속해 있고, 운동할 수 있다. 계량은 관측자의 운동 속도에 의해 상대적으로 결정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질적 다양체의 거리 계량은 공간을 구성하는 힘의 영향과 운동 속도를 포함한다.

질적 다양체에서 항들 간의 관계가 공간이며, 이 관계가 힘들의 세기와 조건에 따라 배치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질적 다양체에 따른 공간은 그 자체가 변이적이다. 변이하는 공간은 힘들의 배치 이전에 선험적인 전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공간은 우리의 지각과 더불어 생겨나며, 변화에 따라 공간의 구조는 변동한다. 공간이 변이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변화가 사라지지 않은 채, 지속하면서 유지하는 일종의 준안정적인 상태일 뿐이다. 이 상태가 계속적일 때, 원래 그래왔고 변하지 않은 채 변할 수 없는, 동일한 것으로 이를 착각하는 오류가 발생한다.


홈 패인 공간(espace strié)과 매끈한 공간(espace lisse)

들뢰즈는 『천개의 고원』에서 변이하는 공간을 홈 패인 공간과 매끈한 공간이라는 양상으로 설명한다. 홈 패인 공간은 불변하는 패쇄적 공간이며, 머무르는 정주민의 공간이다. 매끈한 공간은 유동하고 이동하며, 변화를 거듭하는 유목민의 공간이다.

들뢰즈가 공간을 두 방식으로 설명하는 이유는 이 둘을 단순히 대립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두 공간은 사실상 서로 혼합된 채로만 존재한다.“매끈한 공간은 흠이 패인 공간 속으로 번역되고 이 공간을 가로지르는 한편 홈이 패인 공간은 부단히 매끄러운 공간으로 반전되고 되돌려 보내진다.”(들뢰즈, 2001:907) 두 공간은 서로 결합하고 개입하며 동시에 나타나며, 상호 혼합하는 형식과 뒤섞이는 상태로 공존한다.

홈 패인 공간은 유클리드 기하학에 의해 연역적으로 도출되어, 사물이 놓인 자리가 공간의 위치와 동일하다. 홈 패인 공간은 원근법적 시선으로 축조되고 조직되며, 빛의 깊이를 부여받은 시각적 공간이다. 이 공간은 로고스(logos)의 질서를 구현하면서 지정된 간격에 따라 일정하게 분할되며, 어떠한 변화도 겪지 않는다. 홈 패인 공간은 씨실과 날실의 수직과 수평적 교차 구조로 짜여진 직물이나 자유로운 바다 위에 그려진 촘촘한 항로와도 같다. 홈 패인 공간의 경계는 닫혀 있기에, 그 공간은 유한하며, 경계 내부는 일정하게 구획지워져 있다.

매끈한 공간을 설명해주는 대표적인 예시는 바람에 의해 생겨나고 해체되는 모래 언덕과 경계와 위계 없이 바람과 소음, 색과 소리의 경험에 의지하여 항해하는 바다의 이미지이다. 매끈한 공간은 유동적 공간으로, 질적으로 차이나는 것들의 결합에 따라 연속적 변주 과정을 겪는다. 매끈한 공간은 분할 가능하지만, 분할은 노모스(nomos)적 분배를 따른다. 이 분배는 분할의 측량으로 공간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할 할 때마다 분할된 공간의 성격을 변화시킨다. 노모스적 분배의 실행은 양적 측량이 아니라, 새로운 복수적 관계의 창출을 의미한다.

매끈한 공간은 차이 생성의 사건들이 일어나는, 경계 없이 개방된 공간이다. 차이의 운동은 위치와 선을 만들며, 운동의 빠름과 느림의 속도는 공간을 사라지게 하고 생겨나게 하며 움직이게 한다. 매끈한 공간은 공기의 흐름, 바람이라는 비인격적인 개체성에 의해 묶이는 공간이다. 촉각이나 음향이 지시하는 방향이 공간을 만든다. 이 공간에서 공간밖의 초월적 시선은 소용이 없다. 이는 매끄러운 공간이 사막, 스텝, 혹은 얼음에서처럼, 강렬함, 바람과 소리, 힘 그리고 음향적이고 촉각적인 질에 의해 점유되기 때문이다. 매끈한 공간은 이성의 빛이 비추는 광학적 공간이 아니라, 차이들의 우발적 얽힘에 의해 시각이 길을 잃고 더듬고 듣는, 촉각적 음향적 공간이다.

항들간의 관계인 거리(spadium)의 공간에는 이질적 항들 사이의 밀고 당기는 내포적 강렬함이 가득 차 있다. 여기에서 지각은 홈 패인 공간에서 사물을 지각하는 척도와 특성에서 벗어나, 비재현적인 힘의 징후를 느낀다.

역사적으로 홈패인 공간은 국가가 공간을 조직하는 방식이었고, 매끈한 공간은 국가에 대항하는 유목민의 방식이었다.들뢰즈는 매끄러운 공간이 홈 패인 공간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매끄러운 공간은 디지털이 창출한 인터넷 세계와 후기 자본주의의 유연한 금융의 흐름을 설명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끄러운 공간은 변이와 변동을 허용하기 때문에 새로운 거주의 공간을 창출하기에 용이하다.

“홈패임과 매끈함의 작용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이행(passage) 내지 조합(combinaisons)이다. 공간에 행사되는 힘의 구속 아래, 공간은 대체 어떻게 끊임없이 홈이 패이는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다른 힘을 전개하며, 홈패임을 통해 새로운 매끄러운 공간을 토해내는가? 가장 홈이 패인 도시조차 매끄러운 공간을 출현시킨다. 유목민이나 동굴거주민으로서 도시에 거주하는 것. 매끄러운 공간을 재구성하는데 운동, 속도, 완만함으로 충분한 경우도 있다. 물론 매끄러운 공간 자체가 해방적인(libératoire)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나 바로 매끈한 공간에서 투쟁은 변화하고 이동하며, 삶 또한 새로운 도박을 감행하고 새로운 장애물에 직면해서 새로운 스타일을 창안하고, 적을 변화시킨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의 매끈한 공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절대로 믿지 말아라.”(들뢰즈, 2001:953)


<참고문헌>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역, 민음사, 2004
              , 『푸코』, 허경 역, 동문선, 2003 
              , 『천개의 고원』,김재인 역, 새물결, 2001 
              ,『시네마 1: 운동 이미지』, 유진상 역, 시각과 언어, 2002
김은주, 「에토스(ethos)로서의 윤리학과 정동」, 『시대와 철학』제 26권 1호, 2015
Elizabeth Grosz, Architecture from the Outside, MIT Press, 2001
Ian Buchanan/Gregg Lambert, Deleuze and Space , University of Toroto Press, 2005

작성자: 김은주(동덕여자대학교 교양학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