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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 : 공간철학
  영어 : topos(place)
  한자 : 場所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자연과 운동, 시간과 장소, 무한과 연속 등의 개념들을 주제로 다룬다. 그리고 장소 개념은 『자연학』 4권 1장~5장의 주제이다. 이 저술의 목표는 자연 세계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근본 개념들을 제시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장소 개념은 다른 주제들에 비해 이해가 쉽지 않으며,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몇 개의 구절을 가지고 있음에도, 다른 주제들에 비해 연구의 의의가 눈에 띄지도 않는다. 가령 우리가 시간을 객관적이거나 주관적으로 보려고 할 때 가장 먼저 조회할 수 있는 것이 『자연학』의 시간관이다. 무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잠재적 무한을 최초로 언급한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연학』의 연속 이론에서 제논의 역설을 지금과 같은 온전한 형태로 최초로 보고하고 있고, 무한을 통해 연속을 정의한 최초의 사상가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장소 개념은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 필요성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장소 개념은 우리를 둘러싼 경험적인 세계에 관해 일반 이론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가령 우리는 “하나의 물체가 두 개의 장소를 점유할 수 없다”거나 “두 개의 물체가 동일한 장소를 점유할 수 없다”는 등의 일반 원리를 위반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장소 개념은 이러한 원리들 자체를 이해하고자 할 때 요구되는 개념이다. 『자연학』을 위시한 자연 철학은 ‘자연’(phusis)을 탐구하는 학문이며, ‘자연’은 ‘운동과 정지의 원리’이다. 자연을 알기 위해서는 운동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 중에서 ‘장소 운동’, 즉 ‘위치 변화’를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장소를 안다는 것은 운동을 가장 잘 이해하는 길이며, 자연을, 그리고 자연 세계 전체를 해명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둘째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과 구분하기 위한 기준으로 장소 개념을 사용한다. 그에게 존재하는 것은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대상 X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X의 장소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만일 X가 속성이라면, 속성 X가 존재하기 위해 X의 거처로서의 물리적 대상이 존재해야 한다. 반면 만일 X 자체가 물리적 대상이라면, 물리 대상 X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X의 장소가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장소론이 뉴턴식의 절대 공간 이론과 그 성격을 달리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철학, 나아가 그의 이론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필수적인 개념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자연 세계에 관해 상식적이고 경험적인 이해를 하려고 한다면, 그의 장소 개념은 다른 어떤 개념보다 필수적이다. 이 세계를 상식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를 체계화하려고 할 때 장소 개념은 그의 몇 가지 다른 개념들과 더불어 커다란 이론적 도움을 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장소를 “둘러싸는 물체의 부동의 첫 번째 경계”(212a20-1)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둘러싸는 물체가 있고 둘러싸이는 물체가 있을 때, 장소는 이 두 물체가 “접촉하는”(212a6-7) 경계이다. 예를 들어서 물속에 물고기 한 마리가 있다고 해 보자. 둘러싸는 물체가 물, 둘러싸이는 물체가 물고기라고 할 때, 물과 물고기가 접하는 접촉면이 있을 것이다. 이때 접촉면은 두 개가 생긴다. 물에게 하나, 물고기에게 하나. 이 중에서 둘러싸이는 물고기의 접촉면은 물고기의 겉모양(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형상이라고 부른다)이지 장소가 아니다. 두 접촉면 중에서 물고기의 장소는 물과 물고기가 접해 있을 때, 둘러싸는 물에게 생긴 접촉면이다. 이렇게 삼차원의 공간을 차지하는 물체의 장소는 이차원의 면으로 이해된다.

이 설명을 확장해 보자. 나의 장소는 무엇인가? 나는 발바닥의 넓이만큼을 빼고는 공기와 접해 있다. 그러니까 둘러싸인 물체가 나이고, 둘러싸는 물체는 공기와 흙이다. 나와 공기(와 흙)가 접해 있을 때, 공기에게 생긴 공기와 나의 접촉면이 나의 장소가 된다. 나의 장소는 나와 정확하게 같은 모양을 하고 있지만, 나의 것이 아니라 공기(와 흙)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장소의 정의에서 “첫 번째” 경계를 장소라고 했을 때 염두에 둔 상황이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이해에 기반 하여 장소의 몇 가지 특징을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다.

⑴ 어떤 물체 X의 장소는 물체 X와 크기가 동일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둘러싸이는 물체 X와 같은 크기를 갖는 “첫 번째” 장소를 ‘고유한(idios) 장소’라고 부른다. 어떤 물체 X의 고유한 장소는 X보다 크거나 작아서는 안 된다. X의 장소가 X보다 조금이라도 크면, X와 X의 장소 사이에 다른 물체가 끼어 있다는 의미가 된다. X의 장소가 X 이외에 제 삼의 것을 둘러싼다는 것은 X의 장소가 X의 고유한 장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반대로 X의 장소가 X보다 작다면, X의 장소가 X의 일부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불합리한 결과에 직면한다. 이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물체의 첫 번째 장소는 그 물체보다 작지도 않고 크지도 않다”(211a2, 209a28-29)라고 말한다. 물체 X의 겉모양으로서의 경계면과 X의 장소로서의 경계면이 접해 있다는 것은 두 경계면들 사이에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가 된다.

⑵ 아리스토텔레스는 고유한 장소 이외에 ‘공통(koinos) 장소’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누군가 『토지』 3권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본다고 해 보자. ‘그 책은 우리 집에 있어’라는 대답도 가능할 것이고, ‘내 방 안에 있어’라는 답변도 가능할 것이며, ‘『토지』 2권과 4권 사이에 꽂혀 있어’라고 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야를 넓혀서 ‘그 책은 서울에 있어’라는 답변이나 ‘그 책 우주 안에 있지’라는 답변도 틀린 답변이라고 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장소는 토지 3권을 기준으로 해서 범위가 점점 넓어지고, 외연이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다. 여기서 토지 3권보다 범위를 넓혀서, 더 많은 외연을 갖게 된 일체의 장소들도 그 책의 장소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정의에서 언급된 “첫 번째” 장소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토지』 3권의 고유 장소보다 범위가 넓어지면서, 더 넓은 외연을 갖게 된 일체의 장소들을 ‘공통 장소’라고 부른다. ‘집’이나 ‘방’, ‘서울’이나 ‘지구’, ‘우주’가 공통 장소이며, 이 공통 장소들이 『토지』 3권의 ‘장소’일 수 있는 까닭은 이것들이 『토지』 3권의 고유 장소를 포함하는 장소들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렇게 공통 장소를 장소론에서 배제하지 않는 까닭은 ‘자연 장소’라는 독특한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우리가 발 딛고 살고 있는 지구를 기준으로 천체의 모습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묘사한다. 먼저 달 아래 세계(月下계)와 달 위 세계(月上계)가 구분되며, 월상계는 제5원소인 에테르가 채우는 영역으로 영원한 천체들의 원운동이 일어나는 곳이고, 월하계는 달 바로 아래로부터 불, 공기, 물, 흙의 영역이 동심원들을 이루면서 채우고 있는 곳이다. 이때 불, 공기, 물, 흙의 영역을 ‘자연 장소’라고 부른다. 나는 흙과 공기 안에 있지만, 이것들이 불 안에 있으니까 나는 간접적으로 불 안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자연 장소는 공통 장소의 일종으로 이해될 수 있다.

⑶ 아리스토텔레스의 장소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상대론적 공간 개념과 연결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장소를 “둘러싸는 것의 […] 첫 번째 경계”라고 정의하면서, 이를 “거기에서 [둘러싸는 물체가] 둘러싸이는 물체와 접촉하는, 둘러싸는 물체의 경계”라고 부연 설명한다. 나와 나만 둘러싸는 공기가 접촉하고, 물고기와 물고기의 장소가 접촉하며, 물의 영역과 공기의 영역이 접촉하는 것이다. 이렇듯 X의 장소는 X와 X의 장소가 관계 맺는 방식으로 설명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장소는 일종의 ‘경계’이다. 장소가 이차원의 경계라는 존재론적 위상을 갖는다는 것은 달리 말해서 장소가 물리적 대상이나 자연물과 같은 실체적 독립성, 실체적 자립성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장소는 둘러싸는 물체와 둘러싸이는 물체가 있을 때, 이 두 물체의 실체적 자립성에 ‘의존해서’ 존재하는, 말하자면 ‘부대 현상물’(epiphenomena)이다. 마치 점이 선의 단면으로 존재하며, 면이 입체의 단면으로 존재하듯이, 장소는 둘러싸고 둘러싸이는 두 개의 물체가 접해 있을 때 그 경계면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⑷ 아리스토텔레스의 장소 이론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또한 뉴턴식의 ‘절대 공간’ 개념과도 연결될 수 있다. 통상 공간 개념은 삼차원으로 이해된다. 삼차원의 물체가 그 안에서 운동할 수 있는 공간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에는 데모크리토스를 위시한 원자론자들과 플라톤에게서 찾아볼 수 있고, 사상사속에서 가령 뉴턴에게서 절대공간 등의 개념으로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래서 그에게서는 텅 빈 공간, 혹은 진공 이론을 기대할 수 없다.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는 유한한 크기를 가진 채로, 무언가로 꽉 차 있는 물질(plenum) 공간으로 가정되어 있다. 우리가 통상 ‘공간론’을 통해 기대할 법한 설명들이 꽉 차 있는 물체들에 관한 설명들로 대체되어 있는 것이다. 어떤 물고기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텅 빈 공간 같은 개념들은 필요하지 않다. 그 물고기는 움직이면서 끊임없이 물과 ‘자리를 바꾸는’ 과정을 반복할 뿐이다. 우주를 꽉 채우고 있는 자연물들의 운동은 텅 빈 공간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텅 빈 공간 개념을 적극적으로 ‘부정하기 위해’ 『자연학』 4권 6장~9장에서 장소론 만큼의 분량을 할애하여 진공(kenon) 부정 이론을 전개한다. 진공 부정론은 절대 공간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식 논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진공을 그 안에 아무 것도 없는 장소로 이해하고 이를 부정한다. 진공 부정론을 이해한다는 것은 장소론에 대한 철저한 선이해를 요구한다. 그는 『자연학』에서 장소론에 연이어, 진공 부정론을 전개한다. 그는 진공을 물체 내부의 진공과 물체 외부의 진공 이렇게 둘로 이해한다. 이 중에서 후자의 진공관이 물체로부터 독립해 있을 수 있는 절대적 공간관에 대응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진공 부정 이론을 통해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은 데모크리토스를 위시한 고대의 원자론자들이다. 원자론자들은 가득 차 있는 물질 공간 속에서는 운동이 일어날 수 없으며, 운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물체들 사이사이에 텅 빈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물체와 독립적인 절대 공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은 매우 물리적이며 체계적이다.(215a1-216a25) ① 진공이 진공인 한에서는 어떠한 차이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만일 진공이 존재한다면 그 속에서 사물들은 움직이지 않은 채 정지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원소의 자연적 장소 운동과 강제 운동은 위와 아래라는 장소의 구분이 전제된 운동이다. 반면 진공은 무차별적이어서 위와 아래의 구분을 허용치 않고, 일체의 운동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②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던져진 투사체(投射體)의 강제운동이 사람의 손을 떠나 계속될 수 있는 원인은 공기에 있다. 하지만 진공 속에는 공기는 물론 일체의 물체가 없으므로 투사체의 운동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진공은 운동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③ 또한 진공 속에서는 운동중인 사물의 정지를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진공 속에서 운동 중에 있는 어떤 사물은 정지해 있든지, 아니면 보다 강한 것이 그 진로에 개입하지 않는 한 무한하게 운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④ 운동 중에 있는 물체의 속도는 그 물체가 통과하는 매질의 밀도에 반비례하고, 물체의 무게와 매질을 통과하는 시간에 비례한다. 따라서 매질이 보다 희박하고 무형적일수록 운동의 속도는 점차 빨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진공을 매질로 삼는 물체의 운동은 어떠한 정수비도 성립하지 않는 불합리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따라서 진공을 상정하면 운동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참고문헌>
Ross, W. D., Aristotelis Physica (Oxford Classical Texts), Oxford, 1951.
Morison, B., On location: Aristotle's concept of Place, Oxford, 2002.
Jammer, M., Concepts of Space: The History of Theories of Space in Physics, Harvard, 1969.
유재민, 「아리스토텔레스의 장소론 - 『자연학』과 『범주론』을 중심으로」, 서양고전학회, 『서양고전학연구』 23권, 2005. pp. 125-150.
유재민,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에서 ‘경계’(peras) 개념과 제논의 장소의 역설」, 새한철학회, 『철학논총』 79권, 2015, pp. 167-196.
이태수, 「아리스토텔레스의 공간이해」, 인간환경미래연구원, 『인간, 환경, 미래』 11권, 2013, pp. 3~30.

작성자: 유재민(가톨릭관동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