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space)과 장소(place)는 도시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개념이다. 이 두 개념은 학문 분야를 막론하고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 두 개념을 중첩되거나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공간이 좀 더 추상적인 구성물로 간주된다면, 장소는 구체적인 물리적 특징을 갖고 인간의 경험에 의해 변화하는 의미로 가득 차 있는 경계 지어진 공간으로 이해된다. 쉽게 말해 가치가 부여된 공간(space)을 우리는 장소(place)라고 부른다.
지리학자 이-푸 투안(Yi-Fu Tuan)은 이러한 공간과 장소의 개념이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고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고 보았다. 그는 공간과 장소가 대조되는 개념인 동시에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고 보았는데, 공간이 <자유>를 상징한다면, 장소는 <안전>을 상징했다. 공간이 추상적이고, 낯설며, 미완성인 미지의 영역으로 위협을 내포한다면 장소는 안정과 애정을 느낄 수 있는 일상적인 안식처에 가깝다. 투안은 이러한 특성에 따라 <움직임(movement)>이 허용된 ‘공간’에서 <정지(Pause)>하면 그 곳이 바로 ‘장소’가 된다고 말한다(투안 2020:19). 그는 공간에서 멈춰선 인간이 경험과 삶을 축적하고 애착을 갖게 되었을 때 비로소 장소가 된다고 본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언제나 장소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개방된 공간에서 인간은 장소에 대한 열망을 느끼지만, 안전한 장소에서는 반대로 광활한 공간에 대한 열망을 느끼는 것 또한 인간이다. 인간에게는 공간과 장소 모두가 필요하다. “인간의 삶은 안정적인 거주지와 모험지, 애착과 자유 사이에서 변증법적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ibid.: 30).
이러한 공간과 장소는 철학, 수학, 지리학, 건축학, 인류학, 사회학 등 여러 학문의 관심을 받아왔다. 예컨대 프랑스의 사회 이론가들에게 공간은 주어지는 것이 아닌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재생산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대표적으로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vre)는 『공간의 생산』에서 ‘공간적 실천’, ‘공간의 표상’, ‘표상적 공간’ 개념을 통해 사회적 공간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보여준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공간 또한 다른 맥락에서 언제나 의미를 담고 있다. 푸코(Foucault) 또한 감옥의 예시를 통해 국가가 어떻게 공간을 통해 통치하는가를 보여줌으로써 도시의 많은 공간이 국가의 통치성을 위해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것임을 밝힌 바 있다.
장소 개념의 경우 특히 지리학자들에 의해 오랜 시간 주목되어 왔다. 앞서 살펴본 이-푸 투안을 비롯해 팀 크레스웰(Tim Cresswell), 에드워드 렐프(Edward Relph), 도린 매시(Doreen Massey) 등은 장소 개념을 중심으로 다양한 논의를 펼쳐왔다. 이들에게 장소는 실존적인 의미를 가진 주관적이면서도 친밀한 공간으로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이들의 논의에 따르면 도시는 단순히 물리적 공간이 아닌 다양한 정체성과 활력을 부여하는 장소들의 집합체로 도시의 다양한 공동체는 장소 만들기(place making)를 통해 도시에서 스스로의 영역을 만들고 도시를 다채롭게 한다.
많은 학자들이 근대에 들어 이러한 장소가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렐프 2005, 오제 2017). 이들은 근대에 들어 아파트나 대형 쇼핑몰 같은 개성 없는 획일적인 공간이 많아지면서 사람들이 스스로 경험을 축적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장소가 사라지고 있다고 본다. 더 이상 사람들이 서로 상호작용하고, 기억을 공유하며 정체성을 형성하는 장소가 사라지고, 익명으로 존재하여 정체성을 구성하거나 관계를 맺기 어려운 비장소(non-place)가 늘어나고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지나친 이분법적 사고나 장소가 갖는 역동성, 즉 장소는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여전히 현대 도시 환경에서 나타나는 ‘장소 상실’ 현상과 익명화된 공간의 증가를 이해하는데 유요한 분석 틀로 활용되고 있다.
<참고문헌>
이-푸 투안/윤영호 김미선 옮김, 『공간과 장소』, 사이, 2020
앙리 르페브르/양영란 옮김, 『공간의 생산』, 에코리브르, 2011
에드워드 렐프/ 김덕현, 김현주, 심승희 옮김, 『장소와 장소상실』, 논형, 2005
마르크 오제/ 이상길, 이윤영 옮김, 『비장소: 초근대성의 인류학 입문』, 아카넷, 2017
작성자: 이소영(서울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