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쑬루세
  분류 : 포스트휴먼과 도시
  영어 : Chthulucene
  한자 : 地中世

쑬루세(Chthulucene)는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가 복수종의 얽힘의 시대라는 의미로 제안한 시대명이다. 해러웨이인류세(Anthropocene)나 자본세(Capitalocene) 대농장세(Plantationocene)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지금의 파괴적인 상황이 하나의 시대명이라기 보다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기 전의 전환기라는 애나 칭(Anna Tsing)의 의견에 동의한다. 지구에는 지질학적인 전환기들이 있었다. 가령 6600만 년 전, K-Pg경계는 중생대의 마지막이었던 백악기가 끝나고 신생대의 팔레오기가 시작되기 전의 전환기였다. 이때 공룡을 비롯한 동물들과 꽃과 식물과 관련 곤충들 등 육상생물들의 약 75%가 멸종했고 해양 생물들의 멸종도 상당했다. 6번째 대멸종이라 불리는 오늘날의 생태위기는 바로 이 전환기의 징후라는 것이다. 이 전환기가 끝나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것인데, 해러웨이는 이 새로운 시대를 쑬루세라고 명명한다.

쑬루+(chthulu+cene)에서 쑬루는 땅 속의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쏘닉(chthonic)으로부터 해러웨이가 만든 말이다. 땅 속에는 식물의 뿌리줄기들, 곰팡이의 균사들이 이리저리 얽혀있고 박테리아와 벌레들이 우글거린다. 땅 속의 세계는 개체들로 분할되지 않고 함께 얽혀 있지만 하나의 전체는 아니다. 해러웨이에게 쑬루라는 이름을 짓게 한 것은 캘리포니아 지역의 숲에서 새로 발견된 피모아 크툴루(Pimoa Cthulhu)라는 학명의 거미이다. 이 거미는 미국 국립 자연사박물관의 곤충학자 구스타보 호미가(Gustavo Hormiga)에 의해 1994년에 새로운 종으로 명명되었다. 피모아는 고슈트족의 말로 긴 다리라는 뜻이고, 크툴루는 호미가가 흠뻑 빠져있던 호러 SF작가, 러브크래프트(H. P. Lovecraft)의 크툴루 신화에서 따온 말이다. 해러웨이8개의 다리를 촉수로 가진 피모아 크툴루로부터 촉수사유라는 아이디어를 얻었고, 이로부터 새로운 시대명도 도출해 내려 했지만 크툴루(cthulhu)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기에는 난감한 면이 있었다. 크툴루 신화의 괴물들에는 여성혐오적이고 인종차별적인 괴물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크툴루의 어원인 쏘닉(chthonic)으로부터 새로운 단어인 쑬루(chthulu)를 만들어서 러브 크래프트의 괴물 크툴루와 발음과 철자를 구분하고자 했다.

촉수의 형상인 거미 다리로부터 쑬루라는 말의 의미를 뽑아 낼 수 있다. 쑬루는 연결을 의미하지만 모든 연결이라거나 하나의 전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차라리 부분적인 연결들인데 전체가 전제되지 않은 부분적인 연결들이다. 그러므로 쑬루가 의미하는 것은 조화로운 합일이 아니다. 쑬루는 저 연결이 아니라 이 연결을 의미하고, 다른 연결을 위해 기존의 연결을 끊는 것을 의미한다. 땅 속의 것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연결을 만드는 데 결코 머뭇거리지 않을 것이다. 기후격변, 생태격변은 새로운 연결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는 징후 일 수 있다.

쑬루세는 인류세, 자본세, 대농장세 등 여러 이름이 지칭하는 파괴적 시대를 헤치고 우리가 도달해야 할 시대이다. 하지만 이미 진행 중인 시대이기도 하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생명들은 자신들이 땅 속에 함께 얽혀 있는 심쏘닉(symchthonic)한 자들임을 안다. 그들은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쑬루세에서 세계 만들기(worlding)를 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계속 인류세에 살기를 고집한다면, 땅 속의 것들은 우리를 쑬루세의 세계 만들기에서 영원히 축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쑬루세(chthulucene)의 영어접미사 “~cene”지금’, 혹은 시작을 뜻하는 카이노스(kainos)에서 온 말이다. 카이노스는 이미 지나간 과거와 과거의 외삽으로서의 미래 사이에 끼인 경첩으로서의 순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해러웨이카이노스라는 말을, 모든 종류의 시간성과 물질성이 균사에 의해 주입되는 두꺼운, 진행 중의 현존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Haraway, 2016; 2) 쑬루세의 시간은 예측의 시간이 아니라 복수의 종들이 살아온 과거의 많은 이야기들을 현재 속으로 불러들여서 그들의 유망한 실천을 배우고 기억하는 두꺼운 현존의 시간이고, 수많은 살고 죽기에 얽히는 시간이고, 비명에 간 많은 생명들에 대한 애도의 시간이고, 그것으로부터 이 연결을 끊고 저 연결을 시도하는 촉수의 시간이다.

쑬루세의 세계 만들기에는 살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죽기도 함께 있다. 행성지구의 역사에서 대량 멸종은 처음이 아니고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우발적으로 찾아오는 멸종 그 자체를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멸종은 끝이 아니었고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었다. 멸종 이후 다시 생물상들이 풍성해 질 수 있었던 것은 멸종을 피할 피난처가 곳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칭은 약 1만년 전에 시작된 홀로세에는 지질학적인 피난처(refugia)가 풍성했지만 지금은 거의 다 사라져버렸음을 문제로 지적한다. 지질학적인 피난처란 극심한 환경변화가 비켜간 곳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피난처들이 부활의 거점이 되어 주었다. 살아남아 있기만 하다면 언제든 번창의 기회를 잡을 수 있지만 지금의 문제는 피난처들의 붕괴이다. 그것은 회복의 가능성마저 죽이는 이중의 죽음이다. 쑬루세의 세계 만들기(worlding)는 죽음을 막는 것이 아니라 이중의 죽음을 막는 것이고, 이를 위해 피난처를 복구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최유미, 해러웨이, -산의 사유, 도서출판 b (2020)

Donna Haraway, Staying with the Trouble, Duke University Press (2016)

[국역본]도나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 하기, 최유미 역, 마농지 (근간)

 

 

작성자: 최유미 (수유너머 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