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 지리학(Queer Geography)은 지리학과 퀴어 이론이 만나는 교차점에서, 공간을 퀴어하게 재해석하고 전유하고자 하는 비판적 학문 분야이다. 1990년대 초중반 섹슈얼리티 지리학(Geographies of Sexualities)에서 분화된 이 개념은, 정체성 중심의 접근을 넘어 보다 급진적이고 확장된 지리학적 사유를 제안한다.
섹슈얼리티 지리학은 게이·레즈비언 지리학을 포함해 주로 성소수자 정체성과 공간의 관계, 그리고 성적 다양성의 가시화에 집중해 왔다. 1995년 데이비드 벨(David Bell)과 길 발렌타인(Gill Valentine)이 엮은 『욕망을 지도화하기(Mapping Desire: Geographies of Sexualities)』는 이러한 섹슈얼리티 지리학의 주제를 폭넓게 다룬 최초의 중요한 저작으로, 기존의 이성애 중심적이고 고정된 공간 개념을 해체하는 새로운 연구 방향을 제시하며 학문적 전환점을 마련했다.(캐스 브라운 외, 2018:13)
이 흐름에서 분화된 퀴어 지리학은 단순히 성소수자 정체성에 머무르지 않고,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이분법, 고정된 정체성 범주, 그리고 규범적 공간 질서 자체를 해체한다. 이는 남성/여성, 이성애/동성애 같은 이분법적 구분, 정체성을 고정된 실체로 전제하는 사고방식, 그리고 익숙하게 받아들여진 사회적·공간적 질서의 ‘자명함’ 자체를 낯설게 만들고 전복하고자 한다. 퀴어 지리학은 정체성과 공간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문제 삼으며, 그 경계와 틀을 흔드는 비판적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비판적 실천 과정에서 퀴어 지리학은 권력과 규범에 대한 급진적 질문을 던지며, 특히 수행성,(Performativity), 교차성(Intersectionality), 저항 가능성(Resistance Potential)에 주목한다. 수행성은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행위임을 강조하고, 교차성은 인종, 계급, 장애 등 다양한 권력 관계가 공간 경험에 복합적으로 작용함을 드러낸다. 저항 가능성은 이러한 규범과 권력 구조에 맞서 공간을 재구성하고 전복할 수 있는 실천적 역량을 의미한다. 이처럼 퀴어 지리학은 기존 섹슈얼리티 지리학을 보완하며, 이성애 규범성과 고정된 정체성 범주를 비판적으로 전복하는 보다 해체적이고 급진적인 이론적 흐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퀴어 지리학에서 ‘퀴어’는 LGBT(레즈비언Lesbian, 게이Gay, 바이섹슈얼Bisexual, 트랜스젠더Transgender)를 포괄하는 용어를 넘어서, “섹스, 젠더, 성적 욕망, 성적 실천이 안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에 도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연결에 도전하는 작업은 자연스럽게 이성애의 안정성을 뒤흔드는 일로 이어”지며, 그 과정에서 이성애뿐 아니라 동성애 내부의 규범과 정상성에도 문제를 제기한다.(캐스 브라운 외, 2018:25) 이를 통해 퀴어 지리학은 기존의 ‘정상적인’ 성적·젠더적 질서가 공간을 어떻게 조직하는지를 비판적으로 들여다보고, ‘퀴어한 장소(queer place)’의 가능성과 실천을 모색하고자 시도한다.
가령, 서울 낙원동의 게이 커뮤니티는 “성적 소수자가 가시적으로 드러난 공간”으로서, 주변 공간을 성소수자에게 익숙한 환경으로 바꾸고 “주변을 물들이는(queering)” 퀴어링의 공간적 효과를 발휘한다.(김주락, 2015:110). 이는 퀴어링이 단지 공간의 재배치를 넘어 공간 자체가 퀴어 정치의 실천과 저항의 장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마포 레인보우 주민연대(마레연)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레즈비언 퀴어 주민들은 “이성애적 헤게모니에 도전하고 공개적으로 퀴어 섹슈얼리티를 수행하는 운동은 퀴어를 위한 공간을 창출”(강오름, 2015:41)한다는 취지 아래, 마포를 ‘퀴어 동네’로 상징화했다. 그것의 일환으로 “LGBT, 우리가 지금 여기 살고 있다”, “지금 이곳을 지나는 사람 중 열 명 중 한 명은 성소수자입니다”라는 문구가 담긴 현수막 프로젝트를 기획했으나, “어른들이 불편해하신다”, “청소년에게 안 좋다”는 이유로 마포구청에 의해 거부당한다.(강오름, 2015:40) 이에 마포 퀴어 주민들은 사회적 배제와 비가시성에 맞서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고, 도시 공간에 대한 권리와 시민권의 재구성을 요구하는 실천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오랫동안 주변화되어온 퀴어 주민들의 존재가 점차 사회적으로 인지되었으며, 마포는 퀴어가 ‘살 수 있고, 살고 싶은 동네’, 즉 퀴어 동네로서의 상징적 장소로 재구성되었다.
그 밖에도 서울 이태원의 ‘퀴어 골목’은 성소수자들이 사회적 낙인과 배제를 피해 공동체를 형성한 공간이자, 상업주의, 문화적 위계, 그리고 젠더 내부 권력관계가 복합적으로 작동하는 다층적 장이기도 하다. 서울광장에서 열리는 퀴어 퍼레이드는 국가의 기념 공간을 일시적으로 전유하고 전복하는 사례로, 공간이 정체성과 실천에 따라 재구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디지털 공간은 물리적 장소의 한계를 넘어 퀴어 주체들이 새로운 공동체성과 장소성을 창출하는 중요한 장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퀴어 지리학이 주목하는 공간의 정치성과 퀴어 주체의 공간 실천을 생생히 보여준다. 퀴어 지리학에서 공간은 단지 배경이 아니라,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수행되고 협상되는 장소이자, 동시에 규범적 질서에 도전하는 저항의 장으로 이해된다. 퀴어한 존재들이 특정 공간을 점유하고 가시화하며, 공간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과정은 ‘퀴어링(queering)’이라는 개입을 통해 일상적 공간을 탈규범화하고 변형하는 정치적 실천으로 이어진다. 특히 마포의 사례는 퀴어 주민들이 도시 공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시민권의 재구성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퀴어 지리학이 말하는 공간적 시민권(spatial citizenship)의 가능성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최근 퀴어 지리학은 복합적인 권력 관계에 대한 민감성과 분석 범위를 확장하며,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넘어 인종, 계급, 장애, 시민권, 지역성 등 다양한 사회적 범주들이 공간 속에서 어떻게 얽히고 교차하는지를 탐구하고 있다. 특히 도시 중심적이고 백인 중산층 중심의 서사를 비판적으로 해체하며, 농촌, 국경, 탈식민적 맥락 속 퀴어 주체들의 삶과 경험에 주목한다. 이러한 비판적 시도는 앞서 언급한 수행성, 교차성, 저항 가능성에 주목하며, 고정된 장소 개념을 넘어 이동성, 일시성, 관계 맺기와 모임 등 퀴어한 실천들이 어떻게 공간을 지속적으로 재구성하고 권력 관계를 교차시키는지를 드러낸다. 이처럼 퀴어 지리학은 공간을 단순한 배경이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동적 장으로 재해석하며, 기존 지리학적 상상력을 “더 퀴어하게” (캐스 브라운 외, 2018:36) 전환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그 과정에서 퀴어 지리학은 “퀴어 공간 존재론”(캐스 브라운 외, 2018:49)의 가능성으로 재사유되고 있다.
참고문헌
Bell, David, and Gill Valentine, editors. Mapping Desire: Geographies of Sexualities. Routledge, 1995.
캐스 브라운, 제이슨 림, 개빈 브라운 엮음, 김현철, 시우, 정규리, 한빛나 옮김, 『섹슈얼리티 지리학 –페미니즘과 퀴어 지리학의 이론, 실천, 정치』, 이매진, 2018.
강오름, 「“LGBT, 우리가 지금 여기 살고 있다”: 현대 한국의 성적소수자와 공간」, 『비교문화연구』 제21집 1호, 서울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2015.
김주락, 「드러냄으로 물들이는 공간 –서울 낙원동 게이 커뮤니티에서의 이웃관계에 관한 연구」, 『문화역사지리』 제27권 제3호,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 2015.
작성자: 김혜선 (한양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