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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빌과 뉴욕
  분류 : 영미도시문화
  영어 : Herman Melville and New York City
  한자 :


멜빌(Herman Melville)은 각각 19세기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인 『모비딕』(Moby Dick)과 「필경사 바틀비」(“Bartleby, the Scrivener”)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작가로서의 경력과 대표작들의 창작과정이 뉴욕(New York City)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둘의 특별한 관계는 멜빌의 출생지가 뉴욕이었다는 사실에서부터 확인된다. 멜빌은 보스턴(Boston) 출신이었으나 1818년에 뉴욕에 정착하여 직물 수입상을 운영하던 부친과 뉴욕 주 알바니(Albany)에 정착한 네덜란드계 후손이었던 모친 슬하의 여덟 남매 중 셋째로 1819년 8월 1일에 뉴욕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뉴욕으로 이주했던 이유는 당시 뉴욕이 보스턴을 제치고 미국 내 국제무역과 상업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뉴욕으로 이사 온 멜빌 일가는 맨해튼(Manhattan)의 부둣가에 위치한 고급주택에서 거주하였는데, 소식을 듣고 시장의 부인이 직접 환영인사를 하러 올 정도로 뉴욕 사교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보다 원활한 사교생활과 자식들의 교육 때문에 주거지를 도심지인 브로드웨이(Broadway)로 옮겼다. 유년기의 멜빌에게 뉴욕은 유복한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하면서 명망가 자제들이 다니던 초중등 교육기관에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던 안락하고 행복한 추억의 공간이었다. 또한, 이미 국제적 도시로서의 면모를 지녔던 뉴욕에서 근대적 도시 생활 및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가까이에서 접했던 경험은 훗날 그가 「필경사 바틀비」에서 드러낸 도시적 감수성과 『모비딕』의 근간이 되는 문화다원주의적 세계관이 이미 어릴 적부터 배양되고 발아되었던 토양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유년기에 누리던 지복의 터전이었던 뉴욕은 이십대의 그에게는 상실된 고향이 되었다. 1830년에 미국의 대도시들을 강타한 경제 불황의 여파로 부친의 사업이 파산을 겪게 되자 온 가족이 알바니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신경쇠약에 시달리던 부친이 사망한 이후에 멜빌은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은행서기, 상점종업원, 농장일꾼, 학교교사 등의 직업을 전전하였던 그는 1839년에 미국과 영국을 오가는 상선의 선원이 되었다가 일 년 뒤에는 포경선을 타고 남태평양에서 고래잡이를 경험하였고 미 군함에서의 수병생활을 거친 후 1844년에 귀국하여 보스턴에 정착하였다. 이후 멜빌은 뜻밖에도 작가로서의 새로운 삶을 선택하였는데, 그가 1846년부터 세상에 선보이기 시작한 소설들은 자신이 직접 겪은 항해 경험들을 소재로 삼은 해양모험담 장르의 작품들로 독자들의 큰 관심과 인기를 끌게 되어 전도유망한 작가로 문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한편, 1847년에 결혼을 하면서 뉴욕에서 신혼살림을 차린 멜빌은 당대의 문학시장과 비평계를 좌지우지하는 뉴욕 문학계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과 어울리고 지적인 교류를 갖게 됨에 따라 대중소설 작가가 아닌, 깊이 있는 통찰과 주제의 문학을 추구하는 작가가 되려는 각성을 갖게 되었다. 그는 당시의 가장 영향력 있는 출판업자이자 비평가들인 에버트 다이킹크(Evert Duyckinck), 조지 다이킹크(George Duyckinck), 작가이자 편집장인 코넬리어스 매튜쓰(Cornelius Mathews)와의 친교를 통해 이들에게서 장서들을 빌려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고 뉴욕 도서관(New York Society Library)이 소장한 방대한 서적들을 탐독하기도 하였다. 그 덕분에 그는 셰익스피어, 단테, 몽테뉴, 라블레, 토마스 크라운 같은 위대한 작가들의 정수를 접하며 제대로 된 작가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다이킹크 형제와 매튜스가 주도한, 미국 고유의 정치적, 문화적 정신과 주제를 구현한 국민 문학의 창시와 발전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주창한 “청년 미국”(Young America) 운동 그룹과도 교류하였다. 이와 같은 경험들은 멜빌에게 강렬한 지적 자극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을 유럽 특히 영국의 문학과 변별되는 미국 문학의 개척자로서 인식하게 만들어 위대한 미국 문학을 직접 창작하려는 야심을 촉발시켰다.


스스로를 위대한 미국작가의 반열에 올리기 위한 멜빌의 첫 시도는 『모비딕』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모비딕』의 집필에 매진하던 1851년 6월경에 멜빌은 뉴욕을 떠나 매사추세츠 주(Massachusetts)에서 살고 있었는데, 호손(Nathaniel Hawthorne)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비딕』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뉴욕에 가서 홀로 지내면서 탈고에 몰입해야 할 것이라고 적었다는 점이다. 이때 멜빌은 『모비딕』의 구성과 주제를 원래 계획보다 훨씬 복잡하고 심오하게 확장시키느라 고심하던 중이었는데, 그에게 뉴욕은 작가로서의 영혼과 영감을 일깨워주고 다독여줄 유일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모비딕』의 화자인 이쉬마엘(Ishmael)이 뉴욕 맨해튼에서부터 긴 여정을 시작하는 설정 역시 우연이 아니었다. 하지만 혼신을 다해 집필하고 1851년 말에 출간한 『모비딕』이 비평가들과 대중의 외면을 받게 되자 크게 상심한 그는 그해 겨울동안 뉴욕을 오가며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출판업계 인사들과 화해를 모색하며 『모비딕』의 실패를 만회할 또 다른 작품인 『피에르』(Pierre)를 썼으나 이복남매 간의 근친상간을 소재로 삼은데다가 난해한 철학적 관점들이 난무하였으며 무엇보다 『모비딕』이 신성모독적인 작품이라고 비판했던, 한때 그의 작가적 성장에 큰 영향을 끼쳤던 “청년 미국” 운동 그룹에 속한 평론가들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구절 때문에 그나마 『모비딕』이 거둔 미지근한 반응보다 훨씬 참담한 실패를 겪게 된다.


연이은 실패 끝에 멜빌은 자신이 더 이상 장편 소설로 작품의 상업적인 성공을 거둘 수 없음을 깨닫고 인정하게 된다. 이후 멜빌은 문학잡지에 단편소설을 기고하며 근근이 살아가지만 여전히 불멸의 문학작품을 남기고자 하는 욕망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 증거는 1853년 말에 뉴욕에서 발간되었던 월간문학잡지 『퍼트남 매거진』(Putnam’s Magazine)에 두 차례에 걸쳐 연재되었던 「필경사 바틀비」였다. 주지의 사실이다시피, 「필경사 바틀비」의 부제는 “월 스트리트 이야기”(“A Story of Wall Street”)로 뉴욕의 상업 중심지인 월 스트리트에 위치한 사무실을 배경으로 그곳이 대변하는 근현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의 인간성의 비극의 요체를 포착하여 그려냈지만, 그의 사후에서야 『모비딕』과 함께 부활하여 19세기 미국문학의 위대한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렇듯 오늘날 멜빌의 작품세계를 대변하는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의 창작 과정과 배경에는 뉴욕이 자리하고 있었다. 멜빌과 뉴욕과의 관계는 그가 작가로서의 경력을 사실상 포기하고 1863년에 뉴욕으로 다시 돌아와 지내다가 1866년부터 뉴욕시 세관 감시관으로 전업하여 여생을 사는 동안 계속 이어졌다. 1891년, 멜빌이 사망했을 때 그의 영원한 안식처가 마련된 곳 역시 뉴욕이었다.


<참고문헌>
Delbanco, Andrew, Melville: His World and Work, Vintage Books, 2006.
Miller, Perry, The Raven and the Whale: Poe, Melville, and the New York Literary Scene,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7.
Parker, Hershel, Herman Melville: A Biography Vol. 1, 1819-1851,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6.
Robertson-Lorant, Laurie, Melville: A Biography, Clarkson Potter, 1996.
Rogin, Michael. Subversive Genealogy: The Politics and Art of Herman Melvil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5.


작성자: 한광택(한국외대 영어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