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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영화적 재현
  분류 : 한국의 도시영화
  영어 : Downtown in Seoul
  한자 : 漢城 都心 映畵


도심(downtown)은 해당 사회의 헤게모니 변화를 읽을 수 있는 공간적 지표이다. 한국의 도심 경관은 식민 지배에 의해 역사성과 장소성을 상실하면서 구축되었고, 이의 영화적 재현도 개화기 이전에 대한 집단 기억의 상실 속에서 이루어졌다. 특정 장소의 영화화는 해당 공간이 갖는 흥망성쇠 그래프와 일치하는 경향이 있다. 장소에 대한 영화적 흥미는 대체로 그곳이 역사와 문화, 정치의 헤게모니를 누리는 시간대에 집중된다. 한국 영화의 도심 재현도 이러한 양상을 따랐다. 현재 구도심(old downtown)으로 분류되는 종로, 명동의 재현은 주로 1930년대 중후반부터 1970년대에 이루어졌다.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경제와 문화의 주도권을 가지게 된 강남의 재현은, 도심으로 성장했던 1980년대를 거쳐 1990년대 이후, 압구정동 일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통해 문화적 기억을 축적해나가고 있는 중이다.

옛 한양의 중심가는 청계천 북쪽의 종로, 경복궁과 창덕궁의 사이에 위치한 북촌이었다. 권문세가가 거주한 이곳과 달리, 청계천 이남인 남촌에는 몰락한 양반, 서민 계층이 주로 거주했다. 19세기 말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득세에 따라 이러한 전통적 경계는 청계천과 을지로를 사이에 둔 조선인 거주지 종로와 일인 집거지 혼마찌(本町)로 재편성되었다. 혼마찌는 오늘날 충무로와 명동 일대에 해당된다. 이러한 도심 경관을 세트장(set)로 재현한 영화가 <장군의 아들>(1990-1992, 임권택)이다. 3편까지 제작된 이 시리즈는 편을 거듭할수록 공간이 확장되는데, 모든 서사의 중심에 조선 민족의 영웅 김두한(박상민 분)과 야쿠자 두목 하야시(신현준 분)가 관장하는, 종로와 혼마찌의 대립 구도가 놓여 있다. 여기서 종로는 “제국 일본의 공간인 혼마찌와 경쟁하는 한편 나아가 대륙적 저항의 공간인 만주와 접속되면서 그 물리적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상징 공간”으로 재현된다(송효정, 2013:90). 영화는 두한을 찬양하거나 비판하는 여성 인물을 통해 그의 행적이 지닌 양면성을 서사화하지만, 공간의 지리적 방위를 활용하는 미장센으로 민족 공간 종로와 일제의 공간 혼마치에 대한 시각적 은유를 구사한다. 청계천, 전찻길과 같은 시각적 재료는 프레임을 수평으로 분할하는데, 상층부에 주로 민족 공간을 배치함으로써 상하의 우열관계를 통해 관객의 감성적 민족주의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혼마찌 재현이 두드러지는 것은 <모던 보이>(2008, 정지우)이다. 이 영화는 총독부 건축기사 이해명(박해일 분)을 통해 북촌과 혼마찌의 경계를 자유롭게 오간다. 애국과 매국을 모두 거부하는 캐릭터의 독특함은 이동의 자유를 확보하는 매개가 된다. 오프닝에 제시되는 식민지 시기 경성의 기록 영상에서 인상적인 것은 자동차와 전차, 가로등 불빛이 밤거리를 은성하게 수놓는 장면이다. 이는 세트를 활용한 영화적 재현이 근사치에 도달해 있음을 보장받으려는 장치의 일환이다. 불야성인 혼마찌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미쓰꼬시(三越) 백화점 옥상 카페, 난실(김혜수 분)의 양복점, ‘로라(난실)와 모던 보이즈’가 춤추는 클럽의 화려함은 중일전쟁 발발 소식에도 퇴색하지 않고 빛을 발한다. 난실은 시대가 욕망하는 다양한 얼굴을 대변한다. 그녀는 클럽 댄서, 양복점 재봉사, 일어 노래를 대신하는 얼굴 없는 가수, 민족주의 테러리스트(테러 박)이다. 해명은 그녀를 추적하다가 저도 모르게 민족주의 본산지에 빨려 들어간다. 그 공간은 한옥이 즐비한 거리, 명동성당, 클럽의 지하 공간으로 재현된다. 이 공간에 접속한 뒤 소학교 시절 장래희망이 일본인이었던 쾌락적 현실주의자 해명은 욕망의 대상을 모방하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혀 테러 박을 자처하게 된다. 이 영화의 공간적 특성은 민족주의 공간의 확장을 통해 민족주의와 현실추수적 쾌락주의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암살>(최동훈, 2015)은 민족 담론의 지리적 경계를 더욱 적극적으로 해체한다. 한옥의 청계천 이북 지역과 이남 지역에 대한 재현의 일반 관념을 전복하는 것이다. 1933년을 주요 사건의 시간적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친일파 인국(이경영 분)의 사직동 저택은 경복궁 서쪽에 위치해 있다. 이 전통 가옥에서 그는 일제 고위관리와 수시로 만나며 협력 관계를 다져나간다. 한편 임시정부의 경성연락소는 혼마찌 소재의 ‘카페 아네모네’로 설정되며, 조선에 잠입한 독립 운동가는 혼마찌 상징물인 미쯔꼬시 백화점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다. <암살>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1911년과 1949년의 염상진(이정재 분)을 보여주면서 항일투사의 변절과 반민특위의 실패를 통사적으로 재구성한다. <암살>은 <모던 보이>가 확장시킨 민족주의 공간에 대한 관점을 이어받는 동시에 일제와 친일 부역자의 공간을 전통 공간으로 확대함으로써, 1930년대 이후 한국사에서 근대와 전통의 이념적 대립이 가짜 싸움이었음을 증언한다. 이는 한국의 전통․보수적 민족주의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는 관점이다.

해방 후 민족 대립에 의한 공간 분할은 젠더를 중심으로 한 전통과 근대의 대립으로 대체된다. 남성의 영역은 공적 공간이며 이 장소에서 양복차림으로 근대를 구현하는 기표가 된다. 여성은 이분법적으로 재현되는데, 한복차림의 여성은 가정에 주로 거하면서 전통과 민족주의의 기표로 긍정적 의미를 획득한다. 반면 성적으로 오염된 여성은 양장차림으로 술집, 댄스홀 같은 공간에 등장해 불순하고 타락한 근대의 기표로 작동한다. 멜로드라마에서 이러한 경계 해체는 재앙에 가까운 사건으로 묘사된다. <자유부인>(1956, 한형모)의 선영(김정림 분)은 대로변의 양품점 매니저로 취업하면서 성적 방종과 일탈이 시작되고 복장은 한복에서 양복으로 바뀐다. <자유부인>의 주요 장소인 댄스홀은 젠더 위계의 해체가 일시적으로 용인되는 공적 대항 공간으로 나타난다. 댄스홀에서 인물들은 복장이 자유롭고 전통적 젠더 위계 대신 서구식 예법에 따라 행동한다. 전통 이데올로기에 따라 하위주체로 등장하는 선영은 댄스홀에 입성하면서 관객에게 이러한 공간을 제시하는데, 이는 기존 이데올로기가 전복되는 ‘하위주체의 공적 대항 공간’(맥도웰, 2010:264)에 속하는 것이다.

<명동출신>(1969, 김효천)에서 <명동을 떠나면서>(1973, 김효천)로 이어지는 명동액션영화는 거리의 남성을 통해 해방 후 한국 사회의 남성성 모델을 제시한다. 옴니버스 <명동 잔혹사>(1972, 변장호 외)는 동시대의 활기찬 명동거리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명동을 사랑합니다”라는 허장강의 내레이션은 거리의 활기 이면의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과거 여행에의 권유이다. 사나이의 사랑과 의리, 폭력으로 점철된 이곳은 대도시 서울의 매혹과 비정함에 대한 공간적 제유이다. 일본 세력에 의해 형성된 명동은 식민지 근대를 경험한 한국사의 모순이 압축된 공간이다. 주먹세계의 영웅은 항일운동의 상징인 서대문 형무소를 나와 명동에 복귀함으로써 민족혼을 대리하며-1화 <시끄러울 것잉께>(변장호)-, 조직의 보스는 일본 세력과 은밀하게 손잡고서 조직을 떠나려는 부하를 배신한다-2화 <갖고 싶은 여자>(최인현)-. 차세대 보스로 떠오르는 이는 한국전쟁에서 무공을 세운 국가적 영웅으로 등장한다-3화 <대결>(임권택)-. 증인이자 피해자로서 관객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인물 허장강은 수치와 환멸을 맛보면서도 명동을 떠나지 못하는 도시의 일상인으로 재현된다.

1970년대 강남개발은 정부 주도로 이루어진 톱다운(top-down) 방식의 근대화와 맥을 같이 한다. 1960년대 중반 한강이 서울에 편입되었지만 여전히 도심의 문화적 재현이 명동에 집중되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지역은 88올림픽 이전까지 도시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야기하지 못했다. 그러나 기반시설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 학교와 병원, 각종 기관의 강남 이전 정책에 의해 도시 경관은 급속하게 변모하게 된다. 유하의 강남 3부작 중 1978년을 배경으로 한 <말죽거리 잔혹사>(2004)는 이러한 과도기의 8학군 형성사를 보여준다. 논밭 한가운데 고립된 것처럼 보이는 학교, 비포장도로, 만원버스는 기반시설이 열악했던 개발기의 강남을 재현한다. <말죽거리 잔혹사>는 파시즘 문화가 교육제도를 통해 어떻게 아랫세대에게 내면화되는지를 고찰한다. 성적을 통한 학생의 위계화, 포르노를 방불케 하는 교육, 폭력을 앞세운 학생 선도는 교육제도가 국가 이데올로기 장치로 기능하는 과정을 고발한다.

1990년대 초반 압구정동을 배경으로 한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1992, 유하)와 <비상구가 없다>(1993, 김영빈)는 강남 개발에 따른 변화를 수용하는 방법에 대한 모색으로 보인다. 전통 지식인으로 분류되는 문인의 시선을 매개로 한 접근이 이들의 공통점인 것이다. 전자는 동명의 시집을 출간한 시인 유하의 장편 데뷔작이며, 후자는 이순원의 장편소설 『압구정동에 비상구는 없다』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이 두 작품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탐닉과 계몽의 시선을 대변한다.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는 우디 알렌을 꿈꾸는 시인 영훈(홍학표 분)이 압구정 문화에 동화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영훈을 중심으로 한쪽 극에는 찰나의 쾌락을 통해 인생을 탕진하는 것이 목표인 오렌지족 현재(최민수 분)가, 다른 극에는 향토를 지키는 민족시인 용하(노석래 분)가 있다. 대척점을 이루는 두 인물은 각각 압구정동 클럽과 고향 마을을 재현한다. 영훈의 영화 로케이션 장소인 고향 마을은 유하의 시편에서 압구정의 대칭점으로 설정된 하나대의 변주이다. 영훈이 하나대와 결별하고 세련된 압구정 문화에 동화되도록 욕망을 견인하는 것은 클럽 가수 혜진(엄정화 분)이다. 영훈은 경쟁자 현재를 누르고 그녀를 쟁취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럼에도 영훈과 현재의 아비투스 차이는 현격하다. 그것은‘기지바지/공중전화/8mm필름/이륜차’와‘찢어진 청바지/핸드폰/35mm필름/고급승용차’의 대립으로 표상된다.

<비상구가 없다>는 호스트로 치욕과 환멸을 맛보았던 동오(문성근 분)가 압구정동의 소비문화에 탐닉하는 여성들을 살해하는 드라마이다. 1990년대의 신세대 문화는 1980년대 진보운동의 결실의 하나로 ‘군사정권의 타협적 문민화’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와 동시에 동구권 몰락과 문화적 패권의 강남 이전이 이루어지자, 압구정동은 전통 엘리트에게 소외와 환멸의 공간이 되었다.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의 영훈은 “나는 괜찮은 놈”이라는 자기 긍정의 힘으로 이 변화를 돌파해 가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 예컨대 향토를 지키는 민족시인은 압구정동을 구정물 곧, 타락한 현실의 등가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비상구가 없다>의 바퀴벌레 신(scene)으로 재현된다. 동오는 낮에 준표(박상민 분)가 일하는 카페 등지에서 살충제를 분사하는 소독위생업자로 살아가는데, 그의 살인은 벌레를 박멸하는 소독행위와 등가적이다. 살충제를 피해 달아나는 바퀴벌레 이미지에는 소비사회의 쾌락에 탐닉하는 대중을 바라보는 전통 지식인의 시선이 투영되어 있다. 또한 그의 살해 대상이 여성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은 여성 혐오공간으로서 압구정동의 위상을 확인하게 한다.

<태양은 없다>(1998, 김성수)는 갤러리아 백화점 주변, 로데오거리를 배경으로 한 청춘 버디 영화이다. 외환위기의 암울한 그림자 속, 욕망의 공간에 입성한 도철(정우성 분)과 홍기(이정재 분)는 옥상에 나란히 앉아 휘황한 거리를 내려다보지만 그곳에 이들이 비상할 수 있는 공간은 보이지 않는다. 압구정동은 후기자본주의 사회에 접어든 수많은 청춘 군상, 소비와 쾌락에 대한 감각은 발달해 있지만 계급적 약자로서 그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이들의 파괴적 충동과 비애의 공간으로 재현된다. <비열한 거리>(2006, 유하) 역시 경제적 기반이 취약한 젊은 세대의 절망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병두(조인성 분)가 조직폭력배라는 설정은 <태양은 없다>보다 명동액션영화와의 친연성을 부각시킨다. 21세기 강남과 20세기 명동이 같을 수는 없다.‘주먹, 건달, 한량’이 환기하는 낭만성이 사라진 자리에는 조직의 위계와 폭력의 더러움이 스며든다. 폭력의 좌표가 비정함에서 더러움으로 이동한 것은, 그것이 상명하복의 위계를 전복하고 이기적 욕망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한강변 터널의 피비린내 나는 진흙탕 싸움을 통해 폭력의 속성을 시각화한다. 저마다의 욕망이 우선시되는 세계에서 더러움은 비단 조폭만의 것이 아니다. 감독의 자기반영적 인물인 민호(남궁민 역)는 영화적 성공을 위해 친구 병두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비열한 거리>는 조폭의 특수성보다 인간적인 평범함을 부각시킴으로써 이들을 도시인의 초상으로 만들고 있다.

<강남1970>(2015, 유하)은 앞선 강남 영화의 배경이 된 공간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재현한다. 개발 계획이 구체화되면서 부동산 이권을 둘러싸고 명동과 영등포의 조폭 간에 벌어진 싸움이 서사의 주된 골격이다. 명동과 영등포는 일제에 의해 개발된 공간이다. 따라서 1970년대까지 이 두 파가 건재했고 강남 개발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설정은 강남 개발 이전까지 헤게모니를 둘러싼 쟁탈전이 해방 이전의 권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 새로운 공간 개발이 정치적 올바름을 상실한 구체제의 관행을 이식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강남 개발은 식민지 근대의 세계에서 서울이 공간적으로 벗어나는 전환점이 되었지만, 그것이 구체제의 확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한국이 여전히 파시즘에 의한 식민지 근대를 청산하지 못하는 비극의 기원이 여기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강남 형성사를 그린 <강남1970>은 조폭의 행태보다 더욱 조폭스러운 정치 엘리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반성 없는 마초주의는 한국 사회의 민낯이다. 영화 역시 그것을 쌍둥이처럼 무반성적으로 복제한다. 강남의 정체성 탐구는 청산되지 못한 파시스트적 식민 잔재의 유령을 만나는 일이다.


<참고문헌>
송효정, 「식민지 배경 종로액션영화와 <장군의 아들> 연구」,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60집, 한국문학이론과 비평학회, 2013.
맥도웰, 린다, 『젠더, 정체성, 장소』, 여성과 공간 연구회 역, 한울, 2010.

작성자: 진수미 (서울시립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