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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기 아테네
  분류 : 서양도시사
  영어 : Athens
  한자 : Ἀθη̃ναι


고전기 아테네(기원전 508-322년)는 발칸반도 중부에 위치한 해안 도시국가로서 고전기동안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맹주 스파르타와 경쟁관계를 이루었다. 아크로폴리스가 있는 중심부를 아테네시 그리고 그 주변부를 아티카라고 부르며, 전체를 아테네라 일컫는다. 언어는 아티케 방언을 사용하였으며, 이오니아 민족으로 다신교를 믿었다. 기원전 5세기의 대략적 인구는 25만 명 정도이며, 이중 남자 시민은 3만 명 정도 되었다. 화폐단위는 드라크마였으며, 무역의존도가 높았던 아테네의 화폐는 지중해 전 지역, 특히 폰토스(흑해연안)와 이집트 등에 통용되었다.


1. 정치

신화시대의 아티카는 여러 개의 왕국으로 이루어져 있다가 테세우스의 집주(시노이키스모스)를 통해 하나의 국가를 이루게 되었다. 기원전 13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아크로폴리스의 방벽은 이 집주와 관련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집주는 아테네인들에게는 매년 기념되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Thuc. 2.15). 집주를 통해 결속된 아테네인들은 주변의 보이오티아와 도리아 인들에 저항하여 미케네 시대의 전통을 이어갈 수 있었다. 역사시대에 이르러, 그리스의 다른 지역과 같이 군주정은 귀족정으로 변화하였고, 아르콘 제도가 정착하게 되었다. 기원전 683-682년 경 아르콘 제도의 임기가 1년으로 정해지고, 테스모테타이라는 직분이 더해졌음에도 귀족적은 점차 그 힘을 키워나갔다. 그들은 관직을 독점하였고,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하였다. 기원전 632년 킬론(Cylon)의 개혁시도가 실패로 돌아갔고, 기원전 624-621년 드라코(Draco)의 입법도 그들의 기세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솔론의 시대에 이르러 귀족정은 위기를 맞았다. 기원전 594년, 솔론은 토지에 귀속(헥테모로이 hektemoroi: 이들은 생산의 1/6을 지주에게 갚아야 했다)되거나 해외에 노예로 팔려나간 채무노예들의 빚을 탕감해 주었다(세이삭테이아 seisachtheia). 그는 민주정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특히, 경제적 능력에 따라 시민을 펜타코시오메딤노이(pentakosiomedimnoi), 히페이스(hippeis), 제우기타이(zeugitai), 테테스(thetes)의 네 계급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완전한 내적 평화를 이루지 못하여 기원전 561년부터 545년까지 세 차례에 걸친 쿠데타로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가 참주가 되었다. 참주정은 그의 아들 히피아스(Hippias)가 기원전 510년 쫓겨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참주정이 무너지고 귀족들이 다시 득세하고자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클레이스테네스(Cleisthenes)의 개혁은 고전기의 시작이자 진정한 민주주의의 시작을 알렸다. 그는 먼저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다. 그는 기존의 혈연부족을 분산시키고 10개의 부족(phyle)을 임의적으로 편성 하였다. 아티카를 도시, 해안, 내륙으로 구분하고 각각 10개의 트리티스(Trittys)로 나누었다. 그리고 하나의 부족에 도시, 해안, 내륙의 트리티스를 하나씩 편성하였다. 이로써 기존의 혈연부족 중심적 사회는 어느 정도 견제되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또한 참주의 재출현을 방지하기 위해 도편추방제를 도입하였다. 기원전 462/1년 에피알테스는 한 발짝 더 나아가 개혁을 통해 아레오파고스회의 권한을 축소시켰다. 이에 따라 테테스 계급까지 참정권을 행사하는 급진적 민주주의가 자리 잡았다. 기원전 450년 페리클레스(Pericles)의 등장과 함께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절정을 맞게 된다. 그는 배심원 수당을 처음 도입했으며, 이에 따라 시민권의 제한이 불가피해져 아버지가 시민이고 어머니가 시민의 딸인 남자만 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또한 아크로폴리스를 비롯한 아티카 여러 곳에 대규모 건축공사를 벌였다. 파르테논 신전의 재건을 필두로 한 아크로폴리스 재건과 테세우스 건축가의 프로젝트(아고라의 헤파이스토스 신전, 수니온의 포세이돈 신전, 아고라의 아레스 신전, 람누스의 네메시스 신전) 등은 모두 이 당시에 이루어진 업적이었다.
페리클레스가 기원전 429년 사망하자 데마고고스(demagogos)들이 등장했다. 데마고고스는 민중을 뜻하는 데모스(demos)와 지도자를 뜻하는 아고고스(agogos)의 합성어로 민중의 지도자라는 뜻이었다. 급진적 민주주의가 낳은 당연한 결과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클레온, 클레오폰, 히페르불로스 등을 들 수 있는 데마고고스는 귀족 출신이 아니어서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였는데, 이 때문에 귀족집단의 반발이 거세졌다. 기원전 411년 시칠리아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귀족들은 과두정을 세웠다. 400인회가 설립되고 이 400인은 5000인을 선택하여 최종 통치단체를 구성하였다. 또한, 기원전 404년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승리하면서 스파르타는 이들을 지원하였다. 30인 참주정이 들어섰다. 이는 아테네의 급진적 민주주의를 제거하려는 시도였다. 민주주의 지도자들이 도시 밖으로 망명하거나 처단 당했다. 많은 민주주의자들은 당시 반 스파르타적 성향이 강했던 테베로 망명하였다. 특히 트라시불로스(Thrasyboulos)라는 인물은 테베에서 세력을 키워 기원전 404년 아티카 북부, 테베와 아테네 시내 중간에 위치한 필레(Phyle)를 점령하였다. 기원전 403년 트라시불로스는 피레우스 항구까지 진격해 나갔다. 여기서 30인 참주정의 지도자 크리티아스(Critias)가 죽고 아테네에 다시금 민주주의가 자리 잡았다. 이후 아테네는 고전기가 끝날 때까지 민주정의 체제를 계속 유지하였다.


2. 전쟁

기원전 5세기 초 소아시아 지방에서 이오니아 민족의 대 페르시아 반란이 일어났다. 페르시아는 아테네를 이오니아 민족의 배후로 생각하고 기원전 490년과 480-479년 두 차례 아테네를 공격하여 이른바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났다. 기원전 490년 마라톤전투와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전, 479년 플라타이아이 전투 등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둔 아테네는 그리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도시국가로 발돋움하였다. 특히 기원전 477년에 델로스 동맹이 만들어지면서 대부분의 에게해 섬들을 비롯한 아시아와 트라키아의 그리스 도시들이 아테네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왔다. 기원전 450년에는 델로스에 있었던 보고를 아테네로 옮기기에 이른다. 디오도로스는 기원전 449/8년 페르시아와의 평화조약, 즉 칼리아스 조약으로 페르시아 전쟁이 종결되었다고 전한다(Diod. 12.4). 그러나 이 조약의 존재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페르시아 전쟁이 끝나자 델로스 동맹국들은 탈퇴를 원했지만, 아테네는 오히려 이들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더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기원전 450년대에는 아테네가 동맹국들과 함께 이집트, 소아시아 지역 등에서 활발하게 전투를 치렀다. 기원전 457년에는 중부 그리스의 타나그라 전투에서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에게 격파 당하기도 했지만, 그 후 코린트, 에기나 등지에서는 승리를 거두었다. 팽팽한 전투가 계속되자 기원전 446/5년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와 30년 평화조약을 맺는다. 그러나 이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기원전 431년 27년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였다. 스파르타는 아테네가 코르키라와 코린트 사이의 전투에서 코르키라를 원조한 점과 대 메가라에 경제제재, 대 포티다이아에 무력제재 등을 들어 아테네에 최후통첩을 하였다. 아테네가 최후통첩을 거부하자 교전상태가 시작되었다. 아테네는 소모전을 전략으로 택했다. 아테네 도시 성벽 내로 모든 시민을 소거시키고, 아테네시와 피레우스 항구를 연결하는 방벽을 강화하여 항구로부터 물자를 공급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렇게 하면 방벽 밖의 농촌 지역을 스파르타군이 유린한다고 해도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아테네의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스파르타를 해상으로부터 공격할 심산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430년 방벽 내에 전염병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아테네인들의 지도자였던 페리클레스가 기원전 429년 사망하였다. 그 후,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서남부의 필로스(Pylos)에서, 스파르타는 그리스 북부의 암피폴리스(Amphipolis)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서로 승리를 주고받았다. 기원전 421년 니키아스(Nicias)의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아테네의 알키비아데스는 이 조약이 불완전하다 하여 반대했다. 그는 스파르타에 적대적인 도시국가들을 규합하여 새로운 동맹을 결성,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였다. 기원전 418년 이에 대한 위협을 느낀 스파르타는 만티네아(Mantinea)에서 이 동맹군을 격파하였다. 기원전 416년에는 아테네 동맹군이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동쪽에 위치한 멜로스섬을 공격했고, 멜로스는 동맹군에게 항복하였다. 투키디데스는 이 전투와 관련하여 ‘멜로스 대화(Melian Dialogue)’라 알려진 유명한 대화를 남겼다(5.84-114). 기원전 415년 아테네의 결정적인 판단 착오가 있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인들을 설득하여 스파르타의 동맹국인 시칠리아의 시라쿠스를 공격하기로 한 것이다. 원정을 떠나는 날 알키비아데스는 헤르메스 신상에 신성모독을 저질렀다는 누명을 쓰게 되었다. 그는 원정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혼자 돌아와 재판을 받으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이 명령에 불복하고 스파르타로 망명하였다. 노쇠한 니키아스가 시칠리아 원정의 지휘를 맡았지만 기원전 413년에 결정적인 패배로 아테네는 큰 타격을 얻게 된다.

한편, 스파르타로 망명한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에 아티카 외곽에 진지를 건설하라고 조언한다. 이에 따라 스파르타는 기원전 413년 데켈레이아에 진영을 구축하고 아티카 전역을 유린하게 된다. 아테네의 노예 2만여 명이 스파르타 진영으로 도망하였고, 아테네인들은 완전히 성벽 안에 고립되게 되었다. 또한 아테네가 시칠리아에서 패전하면서 페르시아가 다시 그리스 문제에 개입할 빌미를 제공하였다. 더 나아가 이오니아 지방의 아테네 동맹국들은 델로스 동맹에서 탈퇴하였다. 아테네 내부에서는 과두주의자들이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전복시키고 과두정을 세우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알키비아데스는 과두정을 세우는 조건으로 페르시아와 연맹하였다. 아테네로의 성공적인 입성을 노린 것이다. 알키비아데스는 다시 아테네의 지휘관이 되었고, 기원전 410년 스파르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지휘관 리산드로스는 기원전 406년 에페소스 근처의 노티온에서 아테네 선단을 무찌르고, 기원전 405년에는 람프사코스 근처 아이고스포타미 해전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마침내 기원전 404년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항복하면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막을 내렸다.

그러나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펠로폰네소스 동맹국이었던 코린트와 아르고스, 테베 등은 전쟁을 끝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리산드로스와 아게실라오스 등의 주도로 스파르타가 세력을 확장하자 도리어 아테네와 손을 잡고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아 기원전 395년 이른바 코린토스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아테네가 해상에서 다시 우위를 점하게 되자, 페르시아가 이를 견제하여 스파르타 편으로 돌아섰다. 기원전 387년 ‘왕의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코린트 전쟁이 막을 내렸다. 이 협정을 통해 페르시아는 이오니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돌려받고, 모든 그리스 도시들의 독립을 보장하였다. 페르시아는 아테네나 스파르타가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것을 경계했던 것이다. 이 사이 테베가 세력을 키워 기원전 362년 만티네아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 연합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 전투에서 그들의 지도자인 에파미논다스를 잃고 쇠락하게 되었다. 기원전 4세기동안 주요 도시국가들이 패권을 확립하고자 하였지만 실패하였고, 북쪽의 마케도니아에게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기원전 323-322년 라미아 전투에서 마케도니아가 그리스 연합군에 승리를 거두면서 아테네의 고전기가 막을 내리게 된다.


3. 지리

아크로폴리스(the Acropolis): 고전기 내내 아테네 중심의 성채이자 성소의 역할을 하였다. 기원전 13세기에 이미 성벽이 둘러쳐져 있었다. 신화 속 아테네의 왕인 에렉테우스의 성의 흔적을 지금도 발견할 수 있다. 처음으로 대대적인 공사를 시작한 것은 페이시스트라토스 가문의 치세 하에서였다. 그러나 건축물의 상당수가 페르시아 전쟁 기간에 파괴되었다. 이 시기에 파괴된 건축자재들은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정비하고 재건하는데 재활용되었다. 페르시아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념하며 기원전 450년대에 아테나 프로마코스(전쟁의 여신 아테나)의 거대신상이 페이디아스라는 유명한 조각가이자 건축가에 의해 세워졌다. 이와 함께 페리클레스의 아크로폴리스 재건이 진행되었다. 페이디아스가 총괄 책임자로 지명되었다. 기원전 447-432년에 파르테논신전이 재건되었다. 건축가로는 익티노스(Ictinos)와 칼리크라테스(Callicrates)가 지명되었다. 기원전 437-432년에는 아크로폴리스의 주출입구인 프로필라이아가 건설되었다. 이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로 인해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완벽에 가까운 설계를 보여준다. 이 밖에도 니케 신전과 에렉테우스 신전이 세워졌다.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이용한 디오니소스 극장(기원전 500년경), 페리클레스의 극장(기원전 443년), 헤로데스 아티쿠스의 극장(서기 160년) 등 극장들이 건설되었다. 헤로데스 아티코스 극장 아래쪽에서는 님프의 성소가 발견되었다. 언덕의 남쪽면에는 샘이 있어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이 들어섰다(기원전 420년). 아크로폴리스에서 아고라쪽으로는 판아테나이아 길(Panathenaic Way)이 놓여 있었는데, 이는 판아테나이아 제전 때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는 행렬이 사용하는 길이었다. 이 길을 따라 아크로폴리스에서 아고라로 내려갈 때 처음으로 만나는 신전은 엘레우시스 신전이다. 이 길을 내려오다 보면 서쪽에 낮은 언덕이 보이는데, 이는 의회가 열리던 아레오파고스이다.

아고라(the Agora): 아크로폴리스가 신들의 공간이었다면 아고라시민들의 공간이었다. 이는 아크로폴리스도시 성문인 디필론 성문(Dipylon Gate) 사이에 위치한다. 아고라를 가로질러 판아테나이아 길이 놓여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기원전 6세기 아폴로 파트루스 신전과 12신의 신전 등을 건설하였는데, 페르시아 전쟁 때에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다. 키몬이 전후 재건 작업을 시작하여 불레우테리온(Bouleuterion)과 스토아 포이킬레(Stoa Poikile) 등을 건설하였다. 페리클레스 이후로는 불레우테리온을 재건하고, 남쪽의 스토아 등이 건설되었다. 헤파이스토스 신전(기원전 449년)과 아레스 신전(기원전 440년)은 ‘테세우스 신전 건축가 프로젝트’의 일부였다. 기원전 4세기에는 메트룬이 건설되어 공문서를 보관할 수 있었다. 디필론 성문 밖 케라메이코스(Kerameikos)에는 데모시온 세마(Demosion Sema)라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이곳에는 전몰자들이 공공재정으로 매장되었다. 프닉스 언덕은 아크로폴리스 서쪽에 위치한 아테네인들의 에클레시아(ekklesia: 민회)가 모이는 곳이었다. 기원전 500년경 언덕이 청중석으로 다듬어지고 연설가를 위한 단상이 세워졌다. 기원전 404/3년에는 청중석의 방향이 바뀌어 인조구조물 위에 세워졌다. 아마 바람을 덜 받기 위한 장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330년에는 규모가 확대되고 단상 옆에 제단이 세워졌다.

아테네 시외지역: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 이후 고전기의 아티카는 139개의 데메로 이루어져 있었다. 후에 베레니키다이(Berenikidai)가 기원전 224/3년에, 아폴로니에이스(Apollonieis)가 기원전 201/0년에, 그리고 안티노에이스(Antinoeis)가 서기 126/7년에 추가 되었다. 엘레우시스(Eleusis)나 아카르나이(Acharnai), 아피드나(Aphidna), 마라톤(Marathon) 등의 규모가 큰 데메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도시 기능을 하였으며, 자체의 아크로폴리스와 극장을 포함한 아고라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유명한 신전을 가지고 축제나 제의의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다. 엘레우시스에는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의 신전이 있어 엘레우시스 비의의 중심지가 되었고, 람누스(Rhamnous)에는 네메시스의 신전이, 브라우론(Brauron)에는 아르테미스의 신전이, 수니온(Sounion)에는 포세이돈의 신전이 있었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아테네는 피레우스(Piraeus)와 팔레론(Phaleron)과 같은 유명한 항구가 있었다. 북쪽만이 다른 지역과의 경계를 이루었는데, 북쪽으로는 보이오티아와, 북서쪽으로는 메가라와 경계하고 있었다. 경계선은 명확하지 않아서 주로 자연 지형, 특히 산맥이나 강을 경계로 삼았는데, 보이오티아와의 경계에는 파르네스(Parnes) 산이 메가라와의 경계에는 파테라스(Pateras) 산이 있었다. 경계지역의 데메들은 아테네로 향하는 도로를 방어하는 중요한 기능을 맡았다. 이들에는 공성전을 벌일 수 있는 성채와 초소로 사용된 탑 등이 세워졌다. 특히 중요한 경계 데메로는 메가라와 면한 엘레우시스, 보이오티아와 면한 오이노에(Oinoe), 파나크톤(Panakton), 필레(Phyle), 데켈레이아(Dekeleia), 아피드나(Aphidna), 람누스(Rhamnous) 등이 있다.


작성자: 이상덕(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