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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포룸
  분류 : 서양도시사
  영어 : Roman Forum; Forum
  한자 : Forum Romanum; Forum Magnum; Forum


로마 포룸은 도시 로마의 한복판, 카피톨리누스 언덕(Collis Capitolinus)과 팔라티움 언덕(Collis Palatium) 사이의 계곡지역에 위치한 장방형 광장으로, 기원전 7세기 말 도시를 가로지르는 하수로, 크로아카 막시마(Cloaca Maxima) 건설과 함께 주변의 습지를 메워 마련된 도시 로마 최초의 공공장소이다(김창성, 2009). 당대 여느 도시들의 광장과 마찬가지로 시민들의 종교 및 정치, 경제 활동을 위한 공간으로, 도시 로마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이에 도시 로마의 여러 광장들 가운데 특별히 포룸 마그눔(Forum Magnum) 또는 포룸(Forum)으로 일컬어지며, 제국의 수도 로마를 상징했다.

기원전 7세기 조성된 초기 구역에 위치한 상점(taberna)의 흔적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애초에 포룸은 시장터였다(김창성, 2009). 하지만 기원전 625년을 전후로 하여 로마가 도시국가의 면모를 갖추면서, 포룸은 점차 시민들의 공적 생활, 로마 전통종교의 중심지로 변모했다(김경현, 2008). 가장 이른 시기에 개발된 포룸의 남동쪽 구역에는 왕궁(Regia, 기원전 8세기?)과 베스타 신전(Aedes Vestae, 기원전 7세기?) 등 로마 왕정기의 공공건물들이 들어섰다. 이후 포룸은 도시 로마의 전통과 신화적 기원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여겨졌다. 물론 포룸 이외에도 로마의 여러 구역들에 신전과 제단, 종교적 상징물들이 들어섰지만, 로마 전통종교의 중심지는 신전들이 집중적으로 들어선 포룸이었다. 기원전 1세기 말까지 포룸에는 베스타 신전을 비롯하여 사투르누스 신전(Aedes Saturnus), 콘코르디아 신전(Aedes Concordiae), 카스토르와 폴룩스의 신전(Aedes Castoris) 등 로마를 대표하는 신전들이 차례로 들어섰다. 제정 성립 이후에도 기원후 3세기까지 많은 수의 신전들, 특히 베누스와 로마 신전(Templum Veneris et Romae)을 비롯하여 베스파시아누스 신전(Templum divi Vespasiani), 안토니누스와 파우스티나 신전(Templum divi Antonini et divae Faustinae) 등 제국의 수도 로마와 유일한 통치자 황제를 축원하는 신전들이 포룸을 메웠다(Wakin, 2009: 14-15).

포룸은 여러 신들을 위한 전통종교의 의식들이 진행되는 공간이기도 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인들과 마찬가지로 신전을 신성한 존재들의 거처로 여겼던 바, 이들을 위한 제의와 희생제, 종교 행위의 연장선상에서 행해지던 공동식사 등을 신전 외부에 마련된 공간, 즉 포룸에서 행했다. 그러나 로마 공화정 정치제도의 확립과 함께 포룸은 종교적 중심지에서 정치활동의 장으로 발전했다. 이미 기원전 6세기 말 포룸의 북쪽 구역에 조성된 민회의 회합 장소, 코미티움(Comitium)을 중심으로 이후 원로원 의사당과 공직자들의 청사, 법정 등이 포룸에 들어섰다(차전환, 2007). 기실 민회의 통상적인 회합은 카피톨리누스 언덕 북쪽, 도시 외곽에 위치한 캄푸스 마르티우스(Campus Martius)에서 열리곤 했지만, 입법 관련 표결을 위한 회합은 포룸에서 진행되었다(김창성, 2009).

이와 같은 포룸의 정치적 위상은 기원전 1세기 말 카이사르(Julius Caesar)가 추진한 대대적인 도시 재개발 사업 이후 크게 위축되었다. 카이사르(Julius Caesar)는 기존 자신의 이름을 붙여 명명한 새로운 광장, 율리우스 포룸(Forum Julium)을 조성하고 이곳에 새로운 원로원 건물(Curia Julia)을 건설함으로써 기존 포룸의 정치적 기능을 가져왔다. 또한 베누스 게네트릭스(Venus Genetrix) 신전을 세워 내전에서 자신이 거둔 승리를 기념함으로써, 기존 포룸과는 달리 새로운 광장을 군림하는 통치자의 권력과 위업을 선전하는 공간으로 활용했다.

제정 성립과 함께 포룸은 공적활동의 장으로서의 위상을 완전히 상실했다.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29년 포룸의 남동쪽 구역에 카이사르를 위한 율리우스 신전(Templum divi Iuli)과 자신의 업적을 선전하기 위한 개선문(Arcus Augusti)을 건설하는 등 재건 사업에 나서기도 했지만, 아우구스투스를 비롯한 황제들은 제각기 새로운 광장을 조성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권력과 업적을 선전하는 데 몰두했다. 제정 전반에 걸쳐 포룸은 공화정 시기의 외형을 그대로 간직한 채 유지되었다. 제정기 수차례에 걸쳐 포룸에 위치한 신전과 기념물들의 재건축 사업 새로운 신전, 특히 사후에 신격화된 황제 또는 황제 가문 성원들을 위한 신전 건설 사업 등이 진행되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포룸을 도시 로마의 전통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유지하기 위한 노력에 불과했다(Wakin, 2009: 21-27).

제정기 로마인들은 포룸을 제국의 수도 로마의 위대한 과거를 간직한 일종의 박물관과도 같은 공간에 불과했지만, 제국 각지의 속주민들에게 포룸은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대상이었다. 무엇보다도 포룸은 제정기 로마의 속주통치와 이에 따른 로마화(romanization) 또는 문화접변(acculturation) 현상의 전개과정 속에서 검투경기장이나 목욕장 등과 같이 도시 로마를 모범을 삼는 문명(civitas)의 상징이었다. 이탈리아 반도와 서방 속주들의 도시엔 제각기 로마 포룸을 모범으로 한 광장이 들어섰고, 이러한 광장에선 과거 도시 로마에서 그러했듯이 평의회와 민회를 중심으로 한 공화정 정치의 전통이 이어졌다.


<참고문헌>
김경현,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수도 로마」, 『호서사학』, 제50호, 2008.
김창성, 「아고라와 포룸-도시구조와 정체」, 『도시인문학연구』, 제1집 2호, 2009.
차전환, 「도시국가 로마의 성립」, 『백제연구』, 제46권, 2007.
Grant, Michael, The Roman Forum, London: Weidenfeld & Nicolson, 1970.
Roberts, John W. (Ed.).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lassical World,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Watkin, David, The Roman Forum, Harvard University Press, 2009.

작성자: 최온(고려대 박사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