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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라크르(Simulacre)
  분류 : 디지털도시와 문화적 재현
  영어 : Simulacrum
  한자 :


지리학자 에드워드 소자(Edward W. Soja)포스트메트로폴리스(Postmetropolis)에서 포스트모던화된 현대 도시 공간을 분석하기 위해서 시뮬라크르’(Simulacre) 개념을 끌어들이고 있는데, 이 개념은 원래 보드리야르(Jean Baurillard)1981년 저서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Simulacres et Simulation. 한국어판의 제목은 시뮬라시옹)을 통해서 널리 알려진 개념이다. 시뮬라크르라는 말은 원래 가상을 뜻하는 라틴어 ‘SIMULACRUM’에서 온 것으로 실재를 모방하거나 복제한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보드리야르에게 이 말은 단순한 복제 이상으로, 그는 시뮬라크르를 원본과의 관계가 끊어진 복제내지 원본이 없는 이미지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보드리야르의 이러한 용법은 오늘날 시뮬라크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표준적인 방식처럼 자리를 잡았고, 소자를 비롯해 로스엔젤레스 학파의 도시 연구에서 쓰이고 있는 시뮬라크르 개념의 의미 또한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보드리야르는 사회와 문화의 여러 영역들에 밀어닥친 포스트모던화의 흐름에 주목한 논자로서 그에 따르면 포스트모던화된 사회에서는 원본과 복제 사이의 구분이 사라지며, 이로 인해 원본이나 실재의 우위를 고수하는 플라톤주의적인 사고 방식은 그 유효성을 상실하게 된다. 보드리야르 외에 들뢰즈(Gilles Deleuze) 또한 반플라톤주의를 표방하면서 시뮬라크르 개념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제시한 바 있다. 이처럼 시뮬라크르 개념을 둘러싼 논의들은 공통적으로 실재의 우위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뮬라크르 개념의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실재의 우위에 대한 플라톤의 입장과 이에 대해 포스트모던 철학이 내놓은 반박을 대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국가(politeia) 7권의 동굴의 비유은 실재에 대한 플라톤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동굴의 비유는 이데아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여기에서 플라톤은 지하 동굴에 갇혀 벽에 비친 그림자만 볼 수 있도록 결박되어 있는 죄수들과 이 곳을 탈출해 동굴 바깥의 실재세계를 본 사람을 대비한다(플라톤, 2011:448-54). 그에 따르면 동굴을 벗어난다는 것은 실재에 대한 앎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하며, 플라톤의 주장대로라면, 대부분의 평범한 인간은 실재 자체가 아니라 실재를 본 뜬 이미지에 갇힌 채, 평생을 감각의 노예로 살아가게 된다. 즉 플라톤은 이미지에 사로잡히는 일을 실재를 향해 나아가는 도정에서 결정적인 장애물로 인식한다.

한편 플라톤은 소피스트에서 이러한 이미지의 의미를 보다 세분화하고다. 그에 따르면 실재와의 관계에 따라 이미지 제작술에도 그 종류가 나뉜다. 그 중 하나는 실재와 닮은 것’(eoikos)을 제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사 닮음’(phantasmata)을 제작하는 것이다(플라톤, 2011:82-3, 150-1). 전자의 결과물로는 철학자가 실재를 이해시키기 위해 그것의 닮은 꼴에 의존하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유사 닮음의 제작이다. 이러한 제작의 결과는 가령 조각가가 원래의 형태를 더 아름답게 보일 요량으로 비율을 의도적으로 왜곡해서 만든 이미지로 이어진다. 그런데 플라톤이 유사 닮음을 비판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것이 실재에서 멀기 때문만은 아니다. 플라톤은 닮은 것의 제작이 필요에 의해 꼭 실행되어야 하는 경우를 인정하지만, 만일 유사 닮음이 대상을 미화한 목적으로 거짓을 제공하려는 의도를 동반한다면, 이것이 실재의 질서를 크게 훼손할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유사 닮음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오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보드리야르와 들뢰즈의 반플라톤주의적인 시뮬라크르 개념은 오인을 유발하는 것으로 격하된 유사 닮음의 위상을 역전시키고자 한다. 이는 바꿔 말해 유사 닮음의 이미지가 실재와 관계없이 그 자체로 가치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서 이러한 주장이 현실화되는 과정을 네 단계로 제시하고 있다(보드리야르, 2001:27).

 

a)이미지는 깊은 사실성의 반영이다.

b)이미지는 깊은 사실성을 감추고 변질시킨다.

c)이미지는 깊은 사실성의 부재를 감춘다.

d)이미지는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어떠한 사실성과도 무관하다 : 이미지는 자기자 신의 순수한 시뮬라크르이다.

a)단계에서 이미지는 실재의 반영물로서의 이미지이고 실재와의 연결은 굳건하다. b)단계에서 이미지는 실재를 그대로 반영하지 않음으로써 실재와의 연관을 숨긴다. c)단계에 이르러 이미지는 이제 실재와 관계없는 것이 된다. 보드리야르는 이 단계가 하나의 결정적인 전환점이라고 본다. 다만 c)단계에서는 여전히 이 관계없음을 직접 밝히지 못하고, 거짓으로 실재와의 연결을 연출한다. 마지막 d)단계에서 이미지는 실재로부터 완전히 해방된다. 이 최종 단계에서 이미지는 실재와 관계가 끊어졌음을 굳이 감추지 않는다.

보드리야르는 이 과정을 보르헤스의 단편 과학적 정확성에 대하여에 등장하는 지도영토의 관계에 빗대어 설명하기도 한다(보드리야르, 2001:13). 그에 따르면 영토는 오랫동안 모든 지도들의 모델이었고 지도는 영토와의 닮음을 추구함으로써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제 이 관계는 역전되어 지도가 영토에 선행하며 심지어 지도는 영토를 만들어낸다. 여기에서 지도는 이미지의 세계를 지시하며, 지도가 영토에 선행한다는 것은 이미지가 원본과의 연결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뮬라크르의 사회적 영향력은 소비 자본주의를 통해서 잘 드러나게 된다.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 개념이 소비 자본주의가 증식시킨 이미지들이 전통적인 사물의 질서를 완전히 잠식하는 상황을 함축한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소비 자본주의는 실재와 아무 연관성이 없는 이미지들이 스스로 관계를 만들어내고 움직여나가는 상호작용에 의존한다. 이미지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구성된 의미망은 그 자체로 현실로 받아들여지며 소비를 부추기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예컨대 유명 연예인을 모델로 한 광고의 특정한 이미지는 그 모델의 실재와는 관계가 없는 시뮬라크르라고 할 수 있다. 대중은 이 이미지를 소비함으로써 이미지의 연쇄작용에 가담하고 이미지의 생명을 연장시킨다. 물론 특정한 이미지의 유행이 약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소비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나의 유행을 대체하는 것은 다른 하나의 이미지이다. 보드리야르는 뫼비우스의 띠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들의 순환을 시뮬라크르들의 자전으로 명명한다(보드리야르, 2001:46-7). 이러한 관점에 따를 때, 이제 세계는 가상과 실재의 구분이 무의미한 시뮬라르크들의 자전 속에 머무르는 것이 되며, 보드리야르는 다분히 냉소적인 시선으로 여기에 다른 어떤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한편 들뢰즈의 시뮬라크르 논의는 보드리야르에 비해 훨씬 더 형이상학적 관심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우선 들뢰즈는 플라톤 철학의 문제의식이 동일자(le Même) 모델에 매어있다는 점을 겨냥한다. 동굴의 비유에서 묘사되었듯이, 플라톤에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자체는 원본으로부터 유리된 세계이자, 원본과의 동일성을 통해 극복되어야만 하는 세계로 설정된다(들뢰즈, 2004:18-20; 1999:405-10). 들뢰즈는 플라톤의 이러한 관점이 차이’(différence)에 대한 철저하게 배타적인 입장을 함축한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동일자의 세계를 지향하는 플라톤의 논변에서 이미지는 원본과 차이가 나는 존재이며, 이 차이는 모든 오류와 문제의 근원으로 취급된다. 들뢰즈는 플라톤에 맞서 차이 자체는 결코 병리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차이야말로 모든 존재의 근원적인 기반이라고 주장한다. 들뢰즈의 관점에서 세계는 끊임없이 차이가 생성되는 과정이며 설령 이 과정 중에 부분적으로 동일성이 산출될 수 있을지언정, 그것은 원리적으로 차이에 앞설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뮬라크르는 동일성의 추구와무관한 차이의 원형을 의미하며, 들뢰즈는 시뮬라크르가 원본의 모방이나 복제가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들뢰즈, 2004:20).

시뮬라크르와 원본과의 연결 고리를 끊어낸다는 점에서 들뢰즈의 작업은 보드리야르의 맥락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이후 들뢰즈의 관심은 시뮬라크르 자체보다는 차이를 자립적인 것으로 펼쳐내기 위한 존재론적인 구도의 마련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들뢰즈는 차이를 원본과 관련지어 왔던 관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원본과 차이를 서로 구별하거나, 서열화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존재론적인 구도를 제시한다. 그것은 애초에 원본이나 실재, 본질의 자리가 없으며, 모든 깊이나 위계가 사라진 하나의 평면적인 우주의 이미지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우주에서 시뮬라시옹, 곧 시뮬라크르의 작용은 다른 어떤 것에 대한 반영이 아니라, 그 자체로 매순간 차이를 발생시키는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다(들뢰즈, 1999:419).

에드워드 소자를 비롯한 로스엔젤레스 학파의 도시 이론은 보드리야르와 들뢰즈의 논의에서 원본과의 단절이라는 주제에 집중하면서, 시뮬라크르를 현대 도시를 설명하기 위한 한 가지 필수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인다(Hutchinson, 2010:721). 그에 따르면 디지털 매체도시의 지배적 환경으로 자리잡은 상황에서 시뮬라크르는 지금까지의 도시 이해에서 전제되어 왔던 기초 현실을 대체하는 개념이 된다. 특히 소자는 포스트메트로폴리스에서 도시 상상계의 변화와 포스트메트로폴리스로의 이행을 설명하기 위해 시뮬라크르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논의를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한 가지 주목할 부분은 소자가 시뮬라크르 개념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냉소적인 시선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소자에 따르면 시뮬라크르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관점에는 일종의 종말론적 함축이 내재해 있다. 그것은 시뮬라크르화된 세계에서 모든 기초 현실이 소멸하고 커뮤니케이션의 희열만 남겨지는 상황을 의미한다. 소자는 이러한 종말론적인 함축을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오늘날 대도시에서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한 진보적 저항과 대응의 가능성이 차단될 수 있다고 본다. 그에 따라 소자는 보드리야르가 제시한 이미지의 연속적 단계 중 마지막 단계를 즉각적인 행동과 저항의 정치를 필요로 하는 국면으로 해석한다(소자, 2019:317). 이는 시뮬라크르가 실재를 대체함에 따라 사회의 변화가능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뮬라크르화된 세계에서 전에 없던 새로운 저항과 정치적 의식이 발생한다는 관점으로의 이동을 의미한다. 즉 소자에게 시뮬라크르 개념은 변화된 대도시 현실을 설명하는 분석적 개념일 뿐 아니라 새로운 저항의 지점을 모색하기 위한 전략적 개념으로서 수용된다.

 

참고문헌:

 

에드워드 W. 소자, 이현재·박경환·이재열·신승원 옮김, 포스트메트로폴리스 2, 라움, 2019.

장 보드리야르, 하태환 옮김, 시뮬라시옹, 민음사, 2001

질 들뢰즈, 김상환 옮김, 차이와 반복, 민음사, 2004.

질 들뢰즈, 이정우 옮김, 의미의 논리, 한길사, 1999.

플라톤, 박종현 옮김, 국가, 서광사, 2011.

플라톤, 이창우 옮김, 소피스트, 이제이북스, 2011.

Ray Hutchison. Encyclopedia of Urban Studies. Sage Publication.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