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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소(오제의)1
  분류 : 공간개념
  영어 : Non-place(non-lieux)
  한자 : 非場所

흔히 통과의례적 공간으로 이해되는 비장소는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가 1992년 출간한 책(비장소: 초근대성의 인류학 입문, 이하 비장소)에서 제시한 개념이다여기에서 비장소는 근대의 인류학적 장소와 대비되는 초근대성의 특징을 드러내는 장소이다. 마르크 오제는 인류학적 장소정체성, 관계, 역사가 되고자 하는, 혹은 사람들이 그러기를 바라는 장소라고 말한다 (69-70). 개인의 출생 장소로서 개인의 정체성과 결부된 장소이며, 공유된 정체성과 상호 관계가 형성되는 장인 동시에, (정체성과 관계의 결합을 통해) 최소한의 안정성으로 규정되는 순간부터 불가피하게 역사적이 되는 공간이 인류학적 장소를 특징짓는다(70-71). 그렇다면 비장소는 안정된 정체성이 아닌 일시적 정체성, 일시적 관계, 그리고 역사로 남지 않는 장소들과 관련된다.

한편, 오제의 비장소는 동시대에 요청되는 새로운 인류학을 탐구하는 책이기도 하다. 오제는 이 새로운 인류학적 접근을 설명하기 위해 책의 1장을 할애한다. 이는 인류학자인 자신이 왜 가까운 곳을 대상으로 자신의 경험을 연구하는가에 대한 해명이기도 하다. ‘먼 곳의 인류학에서 가까운 곳의 인류학으로의 전회가 혹시나 인류학의 오랜 탐구 과제였던 유럽의 타자들, ()식민지들-이 가로막힌 데 따른 유럽 인류학의 자구책이 아닌가 하는 의심에 대해 오제는 인류학은 늘 지금-여기의 학문이었다고 말하며, “가속화된 변모 때문에 인류학적 시선이 필요한, 다시 말해 타자성의 범주에 대한 새로운 방법론적 성찰이 필요한 동시대의 세계 그 자체”(35) 때문에 이러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동시대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오제가 동시대를 초근대성supermodernity’²으로 설명하는 계기가 된다(42). 오제에게 초근대성은 탈근대성과 짝패를 이루는 말로, 부정성의 긍정성으로 설명된다(43). 한국판 비장소의 역자 중 한 명인 이상길은 오제가 책을 썼던 시기에 등장했던 후기근대성’, ‘고도근대성’, ‘과잉근대성’, ‘액체근대성같은 개념들과 초근대성이 공명하면서도 오제가 이 용어를 통해 근대성의 사라짐, 다양한 층위의 중층결정, 그리고 과도함을 강조하려 했다고 말한다(176-177).³

특히, 오제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개인의 과도함(사건의 과잉, 공간적 과잉, 준거의 개인화)으로 초근대성을 설명하는데, 시간의 과도함은 바로 사건들의 과잉이며, 이는 수명 연장과 함께 과거의 시간대와 현재의 시간대가 모두 개인의 경험 시간이 된 것과 관련된다 (43). 공간의 과도함은 (지구적으로나, 우주적으로나) 지구의 축소와 관련된다 (44). 인공위성, 교통수단, 텔레커뮤니케이션의 발전으로 인해 개인이 경험하는 공간은 전례 없이 과잉 경험된다(46). 이는 스스로 독립된 의미의 세계를 연구하던 전통적 민족학의 세계와는 상반되는 듯이 보이는데(47), 여기에서 오제는 가까운 곳의 인류학의 필요성을 느낀다. , “승객 및 재화의 가속화된 순환(고속도로, 인터체인지, 공항)에 필요한 설비일 뿐만 아니라 교통수단 그 자체, 또는 거대한 쇼핑센터, 그리고 지구상의 난민을 몰아넣은 임시 난민 수용소”(48)와 같이 지구적으로 편재된 비장소의 출현을 목도하는 동시대는 가까운 곳의 인류학을 요청한다. 오제는 또한 개인 혹은 자아 형상의 증대를 초근대성의 특징으로 꼽는데, 이런 상황에서 인류학자가 프로이트의 예를 따라서 스스로를 자기 문화의 토착민, 요컨대 특권적인 정보제공자로 간주하고, ‘자기 민족지적 분석을 보여주는 몇몇 시론을 감행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54)고 말한다. 이러한 방법론으로 인해 오제의 논의는 종종 객관성에 대한 의심을 받는데, 이상길은 자기민족지학에서 연구자의 개인적 경험이 결국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심층적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결국 타자에 다가가는 가장 효율적 수단이라고 말한다 (199).

한편 오제는 파리를 예로 들어 파리가 역사화의 장소인 동시에 새롭게 변모해가는 공간임을 표지판을 통해서 알린다는 점에 주목한다. 오제는 이로부터 근대성의 핵심을 본다. , 근대는 과거의 장소와 리듬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배경에 두는 것이다 (96). 그러나 예전의 장소들을 통합하지 않는 공간”(97)비장소의 출현을 목도하며, 오제는 1990년대 초의 파리를 더 이상 근대성으로 설명할 수 없음을 느낀다. 여기에서 비장소는 정체성과 관련되지 않고 관계적이지도 않으며 역사적인 것으로 정의될 수 없는 공간이다 (97). 탄생과 죽음이 이루어지는 병원, 일시적인 점유지들 (호텔 체인에서부터 망명자 캠프, 곧 철거될 판자촌까지), 교통수단의 네트워크, 대형 쇼핑몰, 비대면의 상거래 등이 주를 이루는 비장소에서는 고독한 개인성, 일시성, 임시성, 찰나성이 약속된다고 오제는 말한다 (98). 그러나 여기에서 장소가 비장소에 의해 완전히 대체되는 것은 아니다. 오제는 전자는 결코 완전히 지워지지 않으며 후자는 결코 전적으로 실현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98).

장소와 비장소의 구분은 공간과 장소의 대립을 거쳐 이루어지는데, 이를 위해 오제는 미셸 드 세르토가 일상의 발명: 실행의 기예에서 논한 공간과 장소의 구분을 가져온다. 미셸 드 세르토는 보행자들에 의해 실천된 장소, 이동하는 것들이 교차하는 곳을 공간이라고 본다 (99). 이는 공간/장소 개념을 설명한 지리학자들의 일반적인 설명과는 다른데 예를 들어 이-푸 투안(2005)은 공간을 개방, 자유, 위협으로 장소를 안전과 안정으로 구분하며 정헌목(2013)은 이를 공간의 실천이 장소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 도린 매시(2015)는 공간과 장소의 구분이야말로 젠더권력이 형성되는 장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구분 자체를 문제 삼는다.

그러나 오제가 세르토의 공간과 장소 구분에 주목하는 이유는 세르토의 공간에 대한 이해가 비장소에 대한 부정적인 정의를 넘어설 수 있게 해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세르토는 공간을 실천하는 것을 여행의 실천에 비교했는데, 오제가 보기에 여행자의 공간이야말로 비장소의 원형이다 (107).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여행자와 경관의 이동이다. 여행자는 여행지 이를테면, 아테네 에서 과거의 잔해와 미래의 예감을 마주하지만, 그는 곧 그 장소를 떠날 - 오제의 표현으로는 장소의 폐지’(110) - 것이다.

비장소는 어떤 목적(교통, 통과, 상거래, 여가)과의 관련 속에서 구성된 공간과 개인이 이 공간들과 맺는 관계를 가리킨다 (115). 여기에서 오제는 인류학적 장소가 유기적인 사회성을 창조하는 것처럼, ‘비장소는 고독한 계약성을 창조한다고 말한다 (115). ‘비장소에서 개인은 주변 공간과 텍스트, 혹은 그림언어 금연 표지판, 도로표지판, 비상구 표시등, 혹은 구글맵에 표시된 내 현재 위치 등 - 를 통해 매개되고, 계약을 통해 공간과 관계 맺는다. 이제 개인은 낯선 공간에서 더 이상 길을 묻거나 규칙을 확인하거나 하지 않아도 된다. 마트에 들어서면 묻지 않고도 가격을 알 수 있고, 점원과의 대화 없이도 결제를 마칠 수 있다. 여기에서 개인은 장소가 부여하는 일시적 정체성 안에서 평균적 인간이 된다 (122). 오제는 공항에서 출국장을 빠져나와 면세구역을 돌아다니는 개인을 염두하며, ‘비장소에서 인간은 의무에서 자유구역duty-free으로 옮겨간다고 말한다 (122). 물론, 이 자유는 자신의 결백, 혹은 자신이 그럴만한 자격이 있음- 나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나는 이 물건을 살 능력이 있다 등-을 증명함으로써 혹은 증명하기만 하면- 가능하다. 여기에서 비장소의 역설이 발생하는데, 이안 뷰캐넌(2018)은 낯선 환경에서 누구나 집에 있는 것처럼 느낀다는 이 역설이 비장소를 보편적으로 만든다고 말한다.

오제의 비장소는 발표 이후 오제에게 명성을 가져다 주기도 했지만, 또한 비판 역시 적지 않았다. 우선 비장소개념의 엄밀함이 의심받았다. 피터 메리만(2009)은 비장소를 전적으로 초근대성의 특징으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했다. 혹은 장소’/‘비장소는 이용자들에 의해 상이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점 역시 비장소개념을 일괄적으로 적용하기 어렵게 만들었다.이에 대해 정헌목(2013, 129)비장소가 공항이나 호텔, 고속도로 같은 통과의례의 공간뿐만 아니라 새로운 관계와 정체성이 부여되는 공간이자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공간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비록 비장소가 현상적 분석에 그치거나(브뤼노 라투르), 완전히 새로운 현상을 가르친다고 보기는 어려운 지점들(메리만 등)이 있다 하더라도, 분명 비장소를 구성하는 이미지나 텍스트, 각종 코드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는 장소에 대한 새로운 인식, 그에 따라 사람들이 공간과 맺는 관계그 공간 안에서 발생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새로이 조망해 낼 필요성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말한다. , ‘비장소개념의 상대성과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공간 논리들의 경합의 장을 논하기 위해 비장소개념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는 것이다.

다른 한편, ‘비장소논의는 정치경제적 맥락에 대해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판받았다. 이안 뷰캐넌(1999, 397~8)비장소의 확산은 초근대성의 지표이고 비장소의 경험은 초근대성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비장소가 초근대성을 유발하는 것은 아니며 그 원인은 후기 자본주의라고 말하며, 오제의 논의가 비장소출현의 (경제적) 관점에 대한 설명, 혹은 구조적 관점을 결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비장소에서 오제는 정치의 측면을 주요하게 고려하고 있지만, 중심과 주변을 둘러싼 권력의 문제에 집중한 나머지 정작 그 출현의 맥락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다. 특히, 비장소의 공간이 소비의 공간과 긴밀하게 연결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비판은 정당해 보인다.

그러나 이런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오제가 제기한 비장소개념은 책이 처음 출간되었던 90년대 초반보다 오늘날 그 유효성이 더 커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전례 없는 전염병의 시대를 지나며 보편화된 키오스크는 최소한의 대면 접촉마저 가로막으며 완전히 고독한 개인을 만들어냈다. 물리적 공간에서의 집합은 최소화되고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공간에서 넷플릭스와 유튜브를 보며 세계와 만난다. 한편, 디지털 기술의 성장과 함께 달라진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비장소의 문제를 보다 복잡하게 만든다. SNS메타버스 같이 실체적 접촉 없는 접촉과 방대한 네트워크 속에서 사람들은 커뮤니티를 만들고 (상상된) 집단과 관계를 맺는다. 온라인 공간에는 방대한 자료들이 쌓여 디지털 아카이브(문서보관고)사료를 축적한다. 이처럼 비장소가 확장되고 비장소장소성이 다양화되고 복잡해질수록 비장소에 대한 논의는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1) 한국어판은 2017년 이상길, 이윤영의 번역으로 아카넷에서 출간되었다. 이후 이 책의 인용은 별도의 각주 없이 쪽수만을 표기했다.

2) 불어의 원문은 ‘surmodernite’. 한국어판 번역자들은 오제가 이 말을 과도함과 연결짓는다는 점에서 초근대성으로 이를 번역하며, 또한 오제가 과도함외에 중층의 의미를 담기 위해 접두어 ‘sur’를 썼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오제가 영역본의 ‘supermodernity’보다 ‘overmodernity’를 선호했다는 점 역시 밝힌다 (42). 여기에서는 영역본의 번역어를 따라 supermodernity로 사용한다.

3) 반면, 코트디부아르에서 오제를 만나 인류학과 민족지 방법론을 배웠던 브뤼노 라투르(2009)는 탈근대주의를 둘러싼 이러한 논의들이 여전히 근대와 탈근대의 이분법에 매달리고 있다고 비판하며, ‘비근대주의를 주장한다.

4) 오제 역시 이러한 비판을 염두한 듯 2008년에 발간된 영역본 2판 서문에서 장소와 비장소가 엄밀하게 구분된다기보다 공간의 사회성과 상징화의 정도를 측정하기 위한 수단이며, “어떤 장소(만남과 교류의 장소)는 외부자들에게는 비장소가 될 수 있다고 밝힌다.

 

 

참고자료

 도린 매시 (2015),공간, 장소, 젠더, 정현주 역,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마르크 오제 (2017) 비장소: 초근대성의 인류학 입문, 이상길, 이윤영 역, 아카넷.

미셸 드 세르토 (2023), 일상의 발명: 실행의 기예, 신지은 역, 문학동네.

브뤼노 라투르 (2009),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홍철기 역, 그린비.

-푸 투안 (2005), ????공간과 장소????, 구동회, 심승희 역, 대운.

정헌목 (2013), 전통적인 장소의 변화와 비장소(non-place)’의 등장: 마르크 오제의 논의와 적용사례들을 중심으로, 비교문화연구19:1, 107~141.

Ian Buchanan (1999) “Nonplaces: Space in the age of supermodernity,” Social Semiotics, 9:3, pp. 393-8, DOI: 10.1080/10350339909360445

------------- (2018), Oxford Dictionary of Critical Theory, Oxford University Press.

Peter Merriman (2009), “Marc Augé on Space, Place and Non-Places,” Irish Journal of French Studies, pp.9~29.

 

작성자: 배주연(서강대학교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