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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도시 계획
  분류 : 서양도시사
  영어 : Soviet Urban Planning
  한자 :


소비에트 도시 건설은 1917년 혁명으로 건설된 사회주의 체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소비에트 도시 또한 경제 전반의 국유화와 계획이라는 큰 방향성의 영향을 받았다. 물론 러시아의 도시계획은 제정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러시아의 최초 근대 계획도시는 표트르 1세 시대에 건설된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이기 때문이다(J. H. Barter 1980). 그러나 계획도시라는 측면에서 유사할지 모르지만, 도시계획에 대한 이념과 목표, 실제 도시계획을 하게 된 계기 등을 살펴보았을 때, 구 제정 시기 도시와 사회주의 체제 건설 이후 소비에트 도시에는 큰 차이점들이 존재한다.

우선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제정 러시아는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를 경험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주요 도시들의 인구가 1850년에서 1914년 사이에 세 배 증가했다(J. H. Barter 1980). 이로 인해 10월 혁명 이후 건설된 새로운 국가는 형편없는 위생 상태와 질병 그리고 계급에 따른 구획으로 특징지어지는 과잉 인구도시들을 물려받은 상황이었다(R. French 1995).

또한 1917년 혁명은 농촌적 삶이 후진적이며 불평등을 야기한다는 마르크스주의적 태도를 견지했다. 그러한 생각은 인민의 생활수준 향상을 위해서 도·농간의 구분을 폐지해야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전토지에 대한 국유화와 사회와 그리고 모든 도시 재산에 대한 국가 통제 법령이 선포되고 원칙적으로 주택을 프롤레타리아에게 재분배해서 도시 인구 과잉을 일정 정도 해소시키는 안이 실행되었다(R. French 1995).

그러나 이러한 구체제의 공간 질서 붕괴는 도시에 대한 새로운 계획적 접근을 필요로 하게 되었는데 1차 세계대전, 혁명 그리고 내전을 거치면서 이러한 계획이 물리적으로 실현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R. French 1995). 결국 내전이 종결되는 1920년대에 들어서야 새로운 도시계획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 논쟁에서 도시주의자(urbanist)와 반도시주의자(dis-urbanist)라는 두 가지 대립적인 주장이 등장했다(J. H. Barter 1980). 

도시주의 학파는 레오니드 삽소비치(L. Sabsovich)를 중심으로 결성된 도시계획 이론가들로서, 혁명 도시가 기존 도시 지역이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대략 인구 50,000명 정도 규모로 산업체 주변에 위치한 자급적이며 소형인 도시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새로운 도시들에서는 엄격한 토지 사용 지역이 설정되어서 주거와 산업이 모두 발전하고, 휴식과 여가를 취할 수 있는 녹지가 건설되며 비상업적인 도시가 될 것이었다. 소련 도시에 대한 연구자 바터와 프렌치는 이 학파가 정원도시운동(Garden city movement)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보았다(J. H. Barter 1980; R. French 1995).

한편 반도시주의 학파는 미하일 오히토비치(M. Okhitovich)와 모이세이 긴즈부르그(M. Ginsburg)가 주도한 도시계획가 집단으로서 도시주의자들과는 달리 마르크스주의적으로 도·농간의 구분을 해체하려면 전통적인 도시 개념을 완전히 폐기해야한다고 주장했다(R. French 1995). 이들은 정착지가 소비에트 전역에 대상개발(continuous ribbon development 帶狀開發) 형태로 퍼져나가야 한다고 보았다. 이들의 계획에 따르면 개별 주거지들은 녹지 환경에 둘러싸인 도로를 따라 배치될 것이고, 도시 내에서는 공동 식사와 오락 시설에 접근이 용이하도록 건설된다. 그리고 업무 지역은 이 도로들의 교차점에 위치할 것이다. 이러한 도시계획 이론은 1930년대 마그니토고르스크(Magnitogorsk) 건설 당시에 일부 적용되었다(R. French 1995).

그러나 이러한 많은 실험적 이론들은 1920년대 후반 집산화와 1930년대 대숙청 기간을 거치면서 점차 배척되기 시작했고, 실제 도시계획에서 대부분 적용되지 못했다. 이 이론가들은 새로운 사회의 새로운 도시가 공동체적 이상을 구현하는 방향으로 건설되기를 원했지만 노동계급 다수는 집단 주거의 이상을 거부했고 정치적 현실주의자였던 스탈린은 이러한 제안이 너무 공상적이어서 경제적으로 불구화할 수 있는 위험한 시도라고 여기게 되었다. 결국 1930년대 후반이 되면 이러한 실험적 기획들이 포기되고 고전주의 건축 양식으로 회귀하게 된다(R. French 1995).

결국 구 소비에트 연방 시대 대규모 건설 계획에 의해 인구 20만에서 80만에 이르는 인구를 가진 도시들이 연방 지역 전역에 퍼져 건설되었다. 구소련 시기 건설된 도시는 크게 세 가지 세대로 구분할 수 있다. 1세대는 전전 5개년 계획 시기에 건설된 대표적인 도시들이다. 대표적인 도시로 마그니토고르스크, 콤소몰스크-나-아무례(Komsomolsk-na-Amure), 노보쿠즈네츠크(Novokuznetsk, 구 스탈린스크(Stalinsk)), 세베로드빈스크(Severodvinsk, 구 몰로톱스크(Molotovsk)가 있다. 이 도시들은 국가의 광물 자원 채취와 철강 생산 능력 확장을 위한 목적이거나 아니면 전략적 방어 목적으로 건설되었고, 도시 건설은 주로 젊은 열혈 지원자들과 수용소의 강제 노동력을 동원하여 이뤄졌다. 2세대 도시들은 1950년대 중반에서 1960년대 초까지 건설되었다. 이 시기는 핵무기 경쟁 시대와 일치하며 과학 연구와 핵 물질 생산을 위한 도시들을 무에서 창조했다. 대표적인 예는 노보시비르스크(Novosibirsk) 근처의 아카뎀고로독(Akademgorodok), 첼랴빈스크(Chelyabinsk)-70과 같은 우랄 지역의 다섯 개 폐쇄 도시인 “핵 군도” 및 비슷한 목적으로 동시베리아 깊숙이 건설한 몇 몇 도시들이다. 동시에 소비에트 경제 엔진은 자신의 발전 방향을 국가의 더 구석진 지역까지 끊임없이 휘젓고 들어갔다. 브라츠크(Bratsk)와 첼리노그라드(Tselinograd) 등이 이러한 종류의 발전에서 중추가 되었다. 톨리아티, 나베레쥐늬예 첼늬(Naberezhie Chelny)와 같은 3세대 소비에트 도시들은 자동차 생산과 불가분한 관계를 맺고 있다. 자동차 도시로서, 이들의 존재 근거는 모스크바의 프롤레타리아 지구와 니즈니 노브고로드의 사회주의 도시 등의 존재 이유와 일치한다. 하지만 브레즈네프 시대 동안 이 도시들을 건설한 것은 이들의 존재 이유를 다르게 만들었다(L. H. Siegelbaum 2008).  

이러한 소련의 도시계획은 냉전시기 사회주의권 전반에 영향을 주었다. 구 사회주의권 도시계획은 경제적인 동기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 동기에 의해 좌우되었다. 서방 국가들의 도시 발전과 달리 사회주의권 도시계획은 종종 도시에 대한 완전한 재설계를 필요로 했다. 이러한 생각은 중국과 북한을 포함한 모든 공산권 국가들의 도시계획에 반영되었다. 소련에서와 마찬가지로 구 사회주의권 도시들은 처음에는 르 코르뷔지에로 대표되는 프랑스 모더니즘 건축 모델을 채택했고, 스탈린 시대에 소련 건축계에서 일어난 고전주의 양식으로의 회귀의 영향을 받았다.


<참고문헌>

Bater, James H.(1980). The Soviet city: ideal and reality. Vol. 2. Sage Pubns.
French, R. Antony, and Ra French(1995). Plans, Pragmatism and People: the legacy of Soviet planning for today's cities. London: UCL Press.
French, R. A., and F. E. Ian Hamilton eds.(1979). The Socialist City: Spatial Structure and Urban Policy. John Wiley & Sons.
Siegelbaum, Lewis H.(2011). Cars for comrades: the life of the Soviet automobile. Cornell University Press.

작성자: 김동혁(고려대 코어사업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