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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도시
  분류 : 서양도시사
  영어 : Colonial City
  한자 : 植民地都市


식민지도시로 번역되는 ‘colonial city’는 어머니도시(metropolis)를 떠난 식민주의자(colonialist)들이 식민지(colony)에 건설한 도시를 의미한다. 한데 ‘colonial city’에 대한 한국의 번역어는 식민지도시와 식민도시로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번역의 혼용은 colonial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대한 문제와 결부된다. 이것을 단순히 식민지에 있는 도시로 이해한다면 식민지도시가 적합한 번역어이다. 하지만 식민주의 권력에 의해 건설된 혹은 장악된 도시의 성격을 강조할 경우 식민도시로 번역할 수 있다. 식민지도시가 식민화 이전 시대부터 존재하였던 전통적 도시와 식민시대 건설된 신도시를 포괄적으로 부르는 용어라면, 식민도시는 식민주의 권력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진 도시를 지시하는 개념이다.

식민지도시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이를 개념화, 일반화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소아시아인, 페니키아인, 그리스인인 등은 에게 해에서부터, 북아프리카, 스페인남부까지 무역항을 중심으로 하는 수많은 식민지도시들을 건설하였다. 식민지도시 건설에는 첫째, 바다로의 접근성이 용이하고, 둘째, 지형적으로 방어하기 쉬울 것이며, 셋째, 곡창지대를 배후지로 두고 식수가 풍부해야 한다는 환경적 요인이 고려되었다. 메트로폴리스라는 단어가 이주자들이 떠나 온 어머니 도시를 의미한다면, 이에 반대되는 식민지 개척지는 이주해 온 자들이 정착한 도시 혹은 지역을 의미였다.

대항해시대와 더불어 도래한 식민주의 시대에 만들어진 식민지도시는 고대의 그것에 비해 성격과 규모가 크게 변화되었다. 15~19세기까지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은 약탈을 목적으로 하는 원정대 파견에서부터 식민지회사를 설립하고 교역을 목적으로 하는 상선을 파견하는 등 다양한 식민 활동을 전개하였다. 식민주의(colonialism) 시대에 건설된 근대 식민지도시의 특징은 먼저 기존의 세계에서 벗어나 외부, 즉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에 형성되었다. 스페인인의 아메리카 정복에서 알 수 있듯이 라틴아메리카에 건설된 식민지도시들은 초기 귀금속 약탈, 광산개발, 농장건설, 노예무역 그리고 식민지 행정의 중심지였다. 한편, 포르투갈인들은 아라비아 해, 인도양, 남중국해를 관통해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주는 거대한 해양 교역망인 에스타도(Estado)를 형성시키면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 인도의 고아, 말레시아의 말라카 등 인도양에 접한 지역에 수많은 연안지대에 식민지도시를 건설하였다.

유럽인들의 식민지 개척활동은 19세기 자본주의적 산업화가 본궤도에 오르자 상품시장과 원료공급처로서 해외 식민지의 필요성이 부각되면서 유럽열강의 제국주의적 팽창은 전 지구적으로 가속화되었고, 식민지도시의 건설도 활발히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식민주의는 영토 밖의 다른 지역을 점령하고 그곳에 본국의 인구와 더불어 정치, 사회제도, 문화까지 이식하는 정책과 활동이다. 식민지도시는 식민주의가 낳은 식민 활동의 거점이자 식민주의의 산물이다. 넓은 의미에서 식민지도시의 성격은 식민주의의 형태에 따라 구분된다. 식민모국의 인구가 이주해서 형성된 이주식민지(캐나다, 미국, 호주 등)에서는 식민지도시 건설이 활발히 진행된 반면, 이주를 동반하지 않고 단순히 정치적, 경제적 지배를 위해 형성된 착취식민지(인도 등)에서의  식민지도시는 효율적인 원주민 통치를 수행하는 군사적, 행정적 성격이 강했다.

식민지도시들은 주로 무역을 위해 항만시설의 입지가 좋은 해안이나 강가에 건설되었다. 전통적 원주민 도시가 입지한 곳에 새롭게 구축되는 경우가 많았으나, 중국의 상해, 싱가포르 등 황무지와 다름없는 곳에 새로운 도시가 서구적 도시 모델에 따라 건설하기도 하였다.

식민지도시는 식민모국이 자국의 인구 압력을 우려해 인구를 외부로 배출하기 위한 정착지 건설, 또한 자원의 착취를 수월하게 할 수 있는 교통망 확보와 과잉 생산된 상품을 판매하기 위한 시장 창출을 목적으로 건설한 도시들이다. 따라서 도시는 내적발전 경로를 거치지 않고 외부 식민주의자들의 강제 이식에 의해 발생하였다. 특히 식민지 경제가 식민모국의 하부경제로 기능하면서 식량과 물자의 외부의존성 때문에 식민지도시들의 자립성은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식민지도시의 대부분 식민 행정의 중심도시로 건설되었지만, 식민지와 식민모국 사이에 발생하는 무역과 이주를 장려하기 위한 상업적 기능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식민지도시의 경제적 지배자는 주로 이주자들이었다. 일부 부유한 원주민 협력자들이 존재하였지만, 식민지 경제가 지닌 외부의존성으로 인해서 식민모국에서 온 이주자들이 경제의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대부분의 원주민들은 도시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규모 비숙련 노동자층을 형성하였다. 식민지 정부의 농민에 대한 수탈이 가중되면서 농촌을 떠난 식민지 원주민들은 도시외곽에 판자촌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항만, 공장, 건설 등 식민지도시 건설을 위한 작업장과 도시의 청소부, 잡역부, 서비스업 등에 종사하면서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유럽 제국주의 열강들은 항상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인력이 충분히 식민모국에서 공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식민지도시가 발달하고 식민지 영역이 과도하게 확대됨에 따라 토착 엘리트층을 식민지 통치의 협력자로 만들어 낼 필요성이 있었다. 식민지는 제국의 상인, 관료, 군인 등에게 계층상승의 기회를 주었고 식민모국은 자국민의 이주를 장려하였다. 하지만 식민지로 파견된 성인남성의 경우 배우자를 구하기가 어렵고 낮선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식민지도시에 정착하는 이주자는 많지 않았다.

식민지도시의 특징은 무엇보다 인종차별적 도시공간의 분배에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 베트남의 하노이, 인도의 뉴델리, 알제리의 알제 등 유럽이주자들이 건설한 식민도시는 원주민과 유럽계 이주민의 주거, 생활공간이 철저히 분리되어있었다.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인종정책은 식민지도시에 대한 건설계획과 식민지 도시행정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인종간의 혼혈로 인해 인종의 순수성이 소멸할 것을 우려한 식민지정부는 인종간의 교류를 차단하려 애썼고 불변하는 신체적 특징인 피부색을 기준으로 식민지 인구집단을 엄격하게 계층화 하였다. 1809년 케이프타운에서 실시된 ‘호텐트트 법’이나 1920년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제정된 ‘원주민 등록 개정조례’ 등은 원주민 노동력의 이동을 통제하고 저임금 상태로 묶어두기 위한 법률이었다. 원주민의 거주의 자유와 직업선택의 자유는 제한 당했고 특히, 원주민이 식민지를 벗어나 식민모국으로 입국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결국 제국주의 시대 건설된 식민지도시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권력은 소수의 식민모국에서 이주한 집단에 장악되어 있어 식민지 원주민들은 정치적 시민권자로 도시에 존재할 수 없었다. 둘째, 식민지로 이주자 집단은 군사적, 기술적, 경제적 자원을 바탕으로 사회조직 전체를 장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식민지 원주민에 비해 우월하였다. 셋째, 식민지의 대다수 주민들은 인종적, 문화적, 종교적으로 유럽계 식민지 이주자들과 구분되며 원주민 인구가 식민지도시에서 다수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영역에서 소수자에 위치해 있었다.


<참고문헌>
김백영, 『지배와 공간: 식민지도시 경성과 제국 일본』, 문학과 지성사, 2009.
하시야 히로시, 김제정 역,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도시를 건설하다』, 모티브, 2004.
Marie-Cécile BENASSY, André SAINT-LU (ed), La Ville en Amérique espagnole coloniale(Paris: Presses Sorbonne Nouvelle), 1982.
Laurent Fourchard, De la ville coloniale à la cour africaine(Paris: L’Harmattan), 2002.

작성자: 문종현(세종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