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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소(오제의)2
  분류 : 공간개념
  영어 : Non-place(non-lieux)
  한자 : 非場所

비장소는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Marc Augé)가 자신의 저서 비장소: 초근대성의 인류학 입문(Augé 1992)에서 제안한 용어로, 전통적인 장소성의 변화 혹은 상실로 인해 등장한 새로운 형태의 공간성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다. 도시화와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확산, 미디어를 중심으로 한 생활방식의 변화 등 20세기 중반 이후 진행된 급격한 사회문화적 변동은 공간과 장소에 관한 인식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이 같은 변화에 주목한 여러 학자들은 장소에 관한 전통적 인식의 변화 혹은 상실을 강조한 논의를 내놓았는데, 인류학 분야에서 등장한 대표적 개념이 바로 비장소이다.

이를테면 사회학자 마누엘 카스텔(2003)은 비역사성과 무장소성, 획일성 등의 특징을 강조하며 전통적인 장소의 공간과 대비되는 흐름의 공간이라는 개념을 제시하였으며, 지리학자 에드워드 렐프(2005)는 산업화로 인해 획일적으로 변해가는 경관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전통적 장소 정체성과 분리된 장소상실(placelessness)’이라는 개념을 논의한 바 있다. 그런데 비장소 개념은 전통적 장소의 변모라는 현상을 이해할 때 단순히 인간미가 풍기는 장소의 상실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한다는 점에서 다른 논의들과 차이가 있다. 오제에 따르면 비장소에서의 상호작용은 기존의 전통적인 사회적 실천과 다른 형태의 상호작용일 뿐, 나름의 특유한 공간 논리에 따라 작동하면서 장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등장을 야기한다(정헌목 2016: xiii).

오제의 논의는 드 세르토(de Certeau 1984)의 장소와 공간에 관한 개념 분석을 바탕으로 출발한다. 드 세르토에 따르면 분명한 위치를 지닌 채 안정성을 지닌 장소(place)’와 달리 공간(space)’은 속도와 시간, 방향 등 다양한 변수를 함께 고려하여 설명해야 하는 개념이다. 그의 설명에서 어떤 물리점 지점에 하나의 위상만이 부여되는 장소와 달리 공간은 다양한 요소들이 교차하며 각각의 상황과 맥락에 의해 변형되는 성격을 지닌다. 이는 장소라는 물리적 지점에 사람들의 실천(practice)’이 더해지며 다양한 의미가 부여되고 경합되는 존재가 바로 공간이라는 것, 다시 말해 공간을 실천된 장소로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정헌목 2013: 114).

그런데 오제는 이 같은 드 세르토의 장소에 관한 용법과는 다소 다른 맥락에서 장소 개념을 논한다. 오제가 정의하고자 하는 장소는 드 세르토의 분석에서 공간과 대비된 장소와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오제는 인간의 실천적 요소와 결합되기 이전 지점으로서의 장소(드 세르토의 장소’)실천된 장소로서의 공간(드 세르토의 공간’) 사이의 이항대립 대신, 드 세르토가 공간으로 규정한 지점에 주목하여 그를 다시 인류학적 장소(anthropological place)’비장소(non-place)’로 구분할 것을 제안한다. 어떠한 의미가 부여되는 공간에는 사람들의 실천적 행위가 풍부하게 발생하고 개개인의 경험에 의해 매개되는 인류학적 장소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람보다 텍스트나 이미지에 의한 매개가 중심이 되는 비장소역시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장소는 단순히 장소가 없는 곳이 아니라, ‘전통적인(인류학적) 장소가 아닌 곳이다. 오제의 논의에서 비장소와 대비되는 전통적인 장소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성, 장소에 깃든 역사성, 준거를 제공하는 고유한 정체성 등의 성질을 지닌 전통적인 장소에 해당한다. 그와 반대로 비장소는 관계성과 역사성, 정체성의 부재 자체를 특성으로 지니는 공간이다. 해당 공간의 이용자들이 공유하는 익명성을 바탕으로, 이미지와 기호 등의 매개가 지배하는 비장소는 현대사회에서 점차 그 비중이 증가하고 있는 소비와 이동을 위한 공간을 주로 지칭한다. 국제선 공항이나 고속도로, 대형 쇼핑몰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비장소의 특징으로 텍스트에 의한 공간에의 침투”(Augé 1995: 99)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오제의 논의에서 대표적인 비장소의 예로 제시된 고속도로에서의 경우, 운전자들은 추상적인 개체가 제공하는 단어 혹은 이미지만을 제공받게 되고 오직 이들과의 상호작용을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도로가 지나는 지역의 역사나 문화, 사람들이 만들어낸 장소성, 그리고 해당 장소성이 배어있는 경관 자체와 직접적으로 조우하게 되는 일반 국도와 달리, 고속도로 이용자들은 다른 운전자와의 물리적·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해당 장소를 단지 스쳐지나가는 곳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고속도로뿐만 아니라 국제선 공항 역시 단어나 이미지에 의한 매개에 의해 경험되는 비장소의 공간이다. 또한 대형 할인점과 같은 비장소에서는 고객과 점원 사이에 지극히 사무적인 대화 외에는 대화가 거의 발생하지 않으며, 고객이 상품을 선택하고 그 값을 지불하는 데에는 텍스트와 이미지, 신용카드를 읽는 카드리더기만이 동원된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의 작용은 비장소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개인화하고 해당 공간에서 요구하는 승객이나 소비자’, ‘운전자와 같이, 익명의 다수에 의해 공유되는 단일한 정체성만을 생성해 낸다는 것이다.

이 같은 비장소의 특징은 비장소를 이용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해당 공간과 일시적인 계약 관계에 놓이게 한다. 공항이나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입장을 위한 티켓, 상품 결제를 위한 신용카드, 대형 할인점의 운반용 카트 등은 비장소를 상징하는 명시적인 기호들로, 비장소에 들어선 사람들은 이 같은 기호와 함께 비장소 특유의 정체성을 부여받게 된다. 이렇게 비장소의 정체성을 부여받는 사람들은 또한 한편으로 항상 신분 확인을 통해 그 자신의 결백을 입증할 것을 요구받는다(Augé 1995: 102). 비장소의 이용자들은 비장소의 공간과 계약 관계에 놓이는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이 비장소를 이용하기에 적합한 정체성으로 새로이 규정된다는 것, 즉 비장소에서는 그 바깥의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정체성으로 작용하는 통상의 결정인자들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정체성고객이나 승객이라는 정체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을 위한 자격을 입증하기만 하면 된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비장소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일시적인 기존의 정체성 상실로 인한 수동적즐거움과, 비장소에서의 새로운 역할 수행에 기인하는 더 능동적인즐거움을 만끽하게 된다. 하지만 오제는 이로 인해 동시에 비장소의 이용자들은 결국 고독과 함께, 타인과 구분되지 않는 유사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자아 이미지에 직면하게 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처럼 자유로운익명성을 누리는 비장소의 이용자들은 과거로부터 단절된 채 코드나 이미지, 텍스트 등 추상적인 매개물만을 통한 상호작용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비장소의 또 다른 특징으로, 과거는 없고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이 존재하는 현재성(actuality)’의 지배를 들 수 있다. 비장소는 물리적인 공간을 갖는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시간 단위에 의해 측정되는 특성을 지닌다. 마치 공간이 시간에 의해 포획된 것처럼, 지나간 수십 시간의 뉴스 외에는 어떠한 역사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비장소에서는 현재’, 즉 바로 지금 이 순간만이 계속 이어질 뿐이다. 이러한 현재성의 지배 아래 비장소의 이용자들은 친숙함과 보편성이 만들어내는 시각적·청각적 이미지에 둘러싸인다. 이로 인해 낯선 곳에서 길을 잃은 이방인이라 하더라도, 특정한 장소성과 무관하게 분리된 비장소의 익명성을 통해 오히려 편안함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물론 그 편안함은 해당 비장소에 입장 가능한 자격을 입증한 뒤에야 얻을 수 있는 감정이다.

공간 연구에서 비장소 개념을 활용할 때 주의할 점은 비장소가 상대성이라는 측면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용자 입장에서 보면 누구에게나 완전히 비장소로 작동하는 공간은 있을 수 없다. 같은 공간이라 하더라도 해당 공간 바깥의 신분과 정체성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비장소로 여겨지는 곳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인류학적) 장소로 작동할 수 있으며, 그 역 또한 성립 가능하다. 따라서 맥락에 따라 특정한 장소가 비장소화되거나 혹은 특정한 비장소가 장소화될 수 있으며, 장소와 비장소의 구분 역시 분명하지 않을 수 있다(정헌목 2013: 130). 이 같은 비장소의 상대성과 모호성은 복수의 공간 논리들이 경합하며 동시다발적으로 작동하는 새로운 공간이 비장소임을 상기시켜 준다.

비장소에 관한 오제의 논의는 그가 속한 학문 분야인 인류학계의 다른 연구와 달리 이른바 전통적장소로 간주되지 않아 온 공간을 다룬다는 점에서 이례적이지만, 전통적 장소가 아닌 공간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한 현대사회의 현실을 감안할 때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전통시장이 아닌 대형 쇼핑몰, 촌락 공동체가 아닌 고립된 현대식 주거단지, 각종 디지털 매체가 지배하는 도시 생활, 그리고 사이버 공간에 이르기까지 전통적 장소로 여겨지지 않았던 곳들이 인간의 삶에서 차지하는 범위와 중요성은 더 강조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인류학자의 시선에서 이러한 공간을 비장소로 개념화한 오제의 논의가 더욱 의미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Augé, Marc, Non-Places: Introduction to an Anthropology of Supermodernity, translated by J. Howe, London & New York: Verso, 1992 (마르크 오제, 이상길·이윤영 옮김, 비장소: 초근대성의 인류학 입문, 파주: 아카넷, 2017).

De Certeau, Michel, 1984, Practice of Everyday Life,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에드워드 렐프, 김덕현·김현주·심승희 옮김, 장소와 장소상실, 서울: 논형, 2005.

마누엘 카스텔, 김묵한·박행웅·오은주 옮김,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 1, 서울: 한울아카데미, 2003.

정헌목, 전통적인 장소의 변화와 비장소(non-place)’의 등장: 마르크 오제의 논의와 적용사례들을 중심으로, 비교문화연구191, 2013.

정헌목, 마르크 오제, 비장소,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2016.

 

작성자: 정헌목(한국학중앙연구원 인류학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