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이미지
도시인문학 사전
모두보기모두닫기
박스하단
사전 > 도시인문학 사전
 
호적제도
  분류 : 중국도시문화
  영어 : Household Registration System
  한자 : 戶籍制度


중국에서 현대적인 의미의 ‘호적제도’(戶籍制度)는 1949년 국가성립 이후 실시된 가장 기본적인 행정관리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즉 국가가 전체 국민을 대상으로 출생, 사망, 친속관계, 법적지위 등 기본적인 인적정보를 관리하고, 또 이를 바탕으로 취업, 교육, 사회복지 등을 차별적으로 배분했다. 중국 호적제도의 가장 큰 특징은 전체 국민을 출생지역에 따라 농촌호구(農業戶口)와 도시호구(非農業戶口)로 구분하고, 타 지역 호구의 소지자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 및 이주하는 것을 엄격히 관리하고 제한했다는 것이다. 또한 호구는 기본적으로 모계를 통해 계승되었으며,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호구변경이 철저히 제한되었다. 호적제도를 실시한 배경은 당시에 추진되었던 경제성장 전략과 깊은 관련이 있다. 즉 1950년대부터 중국 정부는 도시지역을 기반으로 중화학공업 위주의 성장전략을 추진했으며, 도시지역의 노동자들에게만 비교적 높은 수준의 사회·경제적 서비스를 제공했다. 따라서 당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농민이 도시로 이주하게 되면, 사회경제적 비용의 증가로 인해 이러한 성장전략을 제대로 시행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있었다. 따라서 호적관리 제도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도시로의 비합법적인 인구유입을 규제하여, 도시호구 인구의 증가로 인해 발생하는 정부의 사회경제적 비용 부담의 증가를 억제하는 것이었다(이민자, 2001: 67). 호적제도의 시행에 따라 중국에서는 도농 간의 노동력 이동이 제한됨으로써 ‘이원적 노동관계’(dual labor relation)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호적제도는 계획경제 시기에 도입된 사회주의적 유산이지만, 시장경제로의 개혁 과정에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했다(정규식, 2017).

도농분할적인 고용정책을 기준으로 하여 호적제도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크게 세 단계로 구분된다. 1단계는 1949~1957년까지로 공민에게 거주이전의 자유가 법률적으로 허락되었으며, 농민의 도시이입을 엄격하게 통제하지도 않았다. 즉 1954년 9월 20일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1차 회의에서 통과된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제90조 2항은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은 거주와 이주의 자유가 있다”고 명확하게 규정했다. 따라서 당시 일부 청장년은 농촌을 떠나 도시에 들어와 일을 했고, 도시의 유입인구가 급증했다. 이에 따라 도시에서 일자리와 식량부족 사태가 발생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56년 12월에 국무원은 ‘농민의 맹목적인 유출을 방지하는 것에 관한 통지(關於防止農村人口盲目外流的通知)’를 발표하여 일정 정도 농민의 도시유입을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정부는 주민 이주의 자유를 완전히 제한하지 않았고, 단지 치안과 사회관리의 차원에서 주민의 거주와 이동에 대한 관리만을 강화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도시주민과 농촌에서 이주해온 농민공을 차별하는 이원적 고용제도가 초보적인 형태로 존재했다. 즉 오직 도시호구를 가진 주민만이 정식부문의 일자리에 배정될 수 있었고, 농민공은 정식부문에서 임시공을 모집할 때만 정식부문에 진입할 수 있었다. 

2단계는 1958년~1978년까지의 엄격한 거주이전 통제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중국은 사회주의로의 개조가 기본적으로 완성되었고, 계획경제 체제가 점차 확립됨에 따라 정부 분배와 시장의 자유로운 분배가 결합되어 있었던 원래의 고용정책이 점차 정부가 완전히 직장을 분배하는 형식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정책에 부응하여 1958년 1월 9일에 <중화인민공화국 호구등기 조례>(中華人民共和國戶口登記條例)가 반포되었고, 도시인구를 제한하기 위한 도농분할 정책이 보다 철저하게 실시되었다. 이 조례의 제10조는 “공민이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할 때는 반드시 도시 노동관련 기관의 채용증명서, 학교의 입학증명서, 혹은 도시호구 등기기관이 비준한 전입허가서를 소지하고 있어야 하며, 상주하던 호구등기 기관에 전출 수속의 처리를 신청해야 한다”고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호구등기 조례’를 통해 정부는 도농 간의 인구이동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이원 분할적 호적제도를 기본적으로 확립했으며, 또한 도농 주민의 취업 결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王飛, 2006). 그리고 1975년에는 헌법에서 이주의 자유에 대한 서술이 정식으로 삭제됨으로써, 법률적인 측면에서 도농 간 이주의 가능성이 근본적으로 부정되었다. 따라서 대학에 진학을 하거나 군대에 입대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농촌주민이 도시로 이주해서 취업의 기회를 획득할 가능성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국가가 도시주택분배와 식량배급을 통제했기 때문에 불법으로 이주해온 농촌주민은 도시에 거주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다. 즉 국가는 도시호구를 가진 사람에게만 직장을 배정하여 완전고용과 식량배급을 보장했고, 도시의 취업자에게만 공유주택을 분배함으로써 도시-농촌 분할의 이원적 사회경제 구조를 고착화했다(정규식, 2017). 

3단계는 1978년 이후의 시장화 개혁 시기이다. 1978년 중국 공산당 제11기 3차 중앙위원회에서 시장화 개혁으로의 체제 전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노동력 시장의 운영 기제에도 상당한 변화가 발생했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단번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으며, 기본적으로 여전히 개혁 이전의 도농 분할구조가 지속되었다. 도시주민은 여전히 정부의 통합적인 고용분배 방식에 속해있었고, 정부기관과 사업단위, 국유기업 혹은 집체기업에 취업할 수 있었다. 또한 해고를 비롯한 실업의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고, 안정적인 임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도시호구 신분에 상응하는 사회복지 서비스와 사회보장 서비스(주택, 공공의료, 무상교육 등)를 제공받았다. 이에 따라 도농 간에는 현격한 소득격차가 발생했으며, 더구나 농촌의 주민에게는 사회복지와 사회보장 서비스가 제대로 제공되지 않았다. 이후 1984년부터 중앙정부는 도시경제에 대한 개혁을 진행했고, 이에 따라 점차 기업에 대한 관리와 통제가 완화되었다. 즉 1986년에 국무원은 <국영기업 노동계약제 실행 잠정시행 규정>(國營企業實行勞動合同制暫行規定)을 반포하여 기업의 고용 자주권 확대를 시도했다. 이를 통해 국영기업에서 대량의 계약제 노동자를 고용하기 시작했으며, 방직, 건축 등의 업종에 대량의 농촌 노동력이 유입되었다. 하지만 도시에서 함께 일을 하더라도 도시주민과 농촌에서 이주해 온 농민공 사이에는 여전히 사회적 차별이 존재했다. 즉 도시주민은 고용안정, 상대적 고임금, 사회복지 서비스를 향유했고, 농민공은 불안정한 일자리, 상대적 저임금, 사회복지 서비스 배제의 상태에 처해 있었다. 

1990년대에 진입한 이후 중국 사회에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즉 농민공에 대해 차별적인 ‘노동시장의 이원화’ 문제와 사회적 불평등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면서 호적제도를 개혁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호적제도 개혁의 필요성은 1990년대부터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한 사영경제의 성장과도 관련이 있다. 즉 외자기업을 비롯한 사영기업이 급성장하면서 신흥공업도시와 몇몇 대도시에서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농촌에서 대량의 과잉 노동력을 유입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사회정치적 안정을 위해서도 호적제도 개혁을 통해 농민공을 정부의 사회관리 통제권 안으로 흡수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경제개혁 이후 더욱 극심해진 불평등과 사회적 배제로 인해 농민공의 불만이 폭증하고 있었고, 이는 중국 사회의 안정을 위협하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비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Solinger, 2002). 이에 따라 2000년대부터 중국 정부는 중점 개혁 임무 중의 하나로 호적제도의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특히 2009년 3월에 이미 허베이(河北), 랴오닝(遼寧) 등 13개 성과 시, 자치구에서 농업호구와 도시호구에 기초한 구별을 철폐했으며, 일부지역에서는 ‘거민호구’(居民戶口)로 일원화하는 정책이 추진되고 있다. 

또한 2013년에는 호적제도의 개혁이 중앙정부에 의해 4항 중점 사업의 하나로 선정되었으며, 도시와 농촌의 균형적인 경제·사회 발전이 강조되었다. 호적제도의 개혁을 강조하는 최근의 변화는 ‘농민공시민화’ 전략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농민공도시로의 이주와 정착에 관한 국가의 정책이 기존의 엄격한 금지나 제한적인 허용을 넘어 다양한 형태의 포용 정책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농민공시민화’ 전략은 구체적으로 농민공에 대한 ‘점수적립 호구부여’(積分入戶)라는 정책을 통해 지방정부 차원에서 시행되고 있다. ‘점수적립 호구부여’ 정책은 관할 구역 내 취업인구 중 해당지역 비도시 호구 주민을 대상으로 하여, 호구변경 신청의 각종 자질 및 실적을 점수로 환산하고, 그 총점에 따라 도시호구로 변경해 주는 제도이다. 특히 광둥(廣東)성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이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농민공도시에 보다 잘 융합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에 따라 2009년~2011년 동안 매년 10만 명의 농민공이 광둥성에 호적등록을 했으며, 2012년에서 2014년까지는 매년 15만 명 이상의 농민공이 광둥성에 호적등록을 했다. 또한 농민공인 부모를 따라 도시로 이주해 온 농민공 자녀들을 위한 의무교육 지원도 점차 확대하고 있으며, 농민공에 대한 직업훈련 지원도 강화해 나가고 있다(孔祥鴻, 2015). 

이처럼 호적제도에 대한 정부의 정책 변화는 도농 간, 지역 간 경제적 격차를 줄이기 위해 도시주민과 농민의 통일된 노동시장을 구축하고, 농민공의 사회적 차별 해결을 통한 사회 안정유지를 확보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조치는 지방정부의 이해관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중앙정부에서 추진하는 정책이 그대로 실현되기에는 아직 어려움이 많이 남아있다. 특히 농민공에 대한 사회보장 및 공공서비스 부담은 기업의 투자뿐만 아니라, 지방재정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중앙정부의 정책이 지방정부에서의 실천으로 제대로 연결되지 않고 있다. 예컨대 실태조사에 따르면 여전히 광둥성에서 사회보험에 미가입된 노동자가 717만 명에 달하고, 이들의 90%가 소규모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농민공인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로 인한 노동쟁의가 전체 노동쟁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큰 것으로 나타났다(孔祥鸿, 2015). 따라서 호적제도의 개혁과 ‘농민공 시민화’ 정책의 성공 여부는 농민공에 대한 차별적인 노동정책의 시정 및 평등한 사회보장 정책의 실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이민자, 『중국 농민공과 국가-사회관계』, 나남, 2001.
정규식, 「중국 노동체제의 제도적 특성과 노동자 저항의 정치적 동학」, 성공회대학교 사회학과 박사학위 논문, 2017.
王飛, 「我國勞動力市場分割問題研究」, 西南大學碩士學位論文, 2006.
孔祥鴻, 「廣東省勞動政策述評」, 『廣東社會治理和勞動政策項目報告』, 「현 시기 중국 광둥성 노동정책 평가」, 『한국사회학연구』, 2016, 제 7호, 2015.
Solinger, Dorothy. “Labour Market Reform and the Plight of the Laid-off Proletariat”, The China Quarterly, No. 170, 2002.

작성자: 정규식(성공회대 노동사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