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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도시개조사업(1852~1870)
  분류 : 서양도시사
  영어 : Haussmann
  한자 : Travaux haussmanniens


오스만 도시개조사업은 나폴레옹 3세의 명령으로 세느강 지사(préfet de la Seine)였던 오스만(Georges Eugène Haussmann: 1809~1870))이 수행한 프랑스 수도 파리의 도시 근대화 사업을 의미한다. 1848년 프랑스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나폴레옹 3세는 1851년 12월 쿠데타를 통해 공화정을 전복하고 이듬해 1852년 12월 프랑스 제국(1852~1870)을 선언하며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제국이 선언된 7개월 뒤 1853년 6월 보나파르트주의자였던 오스만은 “환기가 되고, 통일성을 부여하며, 아름답게” 파리를 개조 하라는 위임장과 함께 세느강 지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1870년 지사에서 해임되기 전까지 ‘과거와의 철저한 단절’을 목표로 파리를 근대적 도시로 탈바꿈 시켰다.

19세기 중반까지 파리는 이후 이름 붙여진 세계수도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중세적 도시에 지나지 않았다. 도시인구 증가로 말미암은 과밀화 현상, 복잡하고 좁은 도로망으로 인해 발생하는 교통의 혼잡, 그리고 상, 하수도 시설의 미비로 인해 발생하는 전염병에 취약한 비위생적 환경 등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들은 도시를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1846~1848년 사이에 런던에 체류한 경험이 있었던 루이 나폴레옹은 산업혁명으로 인해 빠르게 변해가는 런던의 쾌적한 공원, 넓은 도로 등 근대적 도시공간에 큰 감동을 받았다.

7월 왕정기 파리 내부 공간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부분적으로 개선하고 해결하려는 시도는 있었다. 하지만 1850년 이후 파리의 도시문제는 점진적인 개선으로는 해결할 수 없게 되었다. 황제의 지원을 바탕으로 오스만은 프랑스의 자본과 노동의 잉여를 광대한 공공사업계획에 투입할 수 있었다. 이상적 도시 공동체를 건설하려 했던 생시몽과 푸리에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그는 “다양한 지역적 상황을 충분히 적적하게 조화시킬 수 있도록 상세하면서도 전반적인 계획”을 수립해서 수도의 사회적 경제적 삶의 공간적 틀을 재조직해 나아갔다. 그러므로 첫째,  새 도로가 낙후된 지역을 관통하도록 할 것, 둘째, 행정기관들 사이의 소통을 원활하게 할 것, 셋째, 철도를 중심으로 그에 이어지는 간선도로를 정비할 것, 넷째, 녹지를 조성할 것, 다섯째, 역사적 기념비적 건물 주위에 보다 많은 공간을 마련할 것 등이 도시개조를 위한 과제로 제기되었다.

오스만의 계획은 새로운 도로망을 비롯해 하수도, 공원, 기념물, 상징적 공간, 학교, 교회, 관공서 건물, 주책, 호텔, 상업점포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한다. 오스만에게 도시는 하나의 전체로 간주되었다. 즉, 도시의 상이한 구역과 기능들은 상관관계를 맺고 활동하는 전체를 구성하기 때문에 엄정한 공간적 조화를 중요시한 오스만은 파리에 직선의 논리, 대칭성, 논리적 정합성, 그리고 세부 공간 디자인의 통일성을 부여하였다. 무엇보다 그는 도시공간에 대해 세세하고 사안별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거대한 규모의 계획과 개념을 통해 넓은 범위로 근대적 도시 계획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도시계획에 있어서 대로화는 최우선적 과제였다. 대로화를 통한 도시개조과정이 오스망화(Haussmanization)라고 불리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스만은 세바스토플 대로(Boulevard de Sebastopol)과 생 미셸 대로(Boulevard Saint-Michel)까지 이어지는 북부-남부를 축으로 거대한 교차로를 건설하였다. 각 대로들이 연결되면서 교차지점에는 파리의 남부와 북부, 동부와 서부를 연결하는 샤틀레(Chatelet)와 같은 광장이 배치되었다.

도시의 허파로서 기능하도록 공원과 개방된 공간의 필요성은 1830년대 위생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 1840년대 낭만주의가 대두하면서 도시에 자연을 접할 수 있는 회복적인 힘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오스만은 ‘자연의 스펙터클’ 개념을 파리에 도입하면서 제국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는 전원적이며 목가적인 공간을 만들었다. 7월 왕정 시절 “무자비한 사막”으로 불리면서 도시재생계획의 특별한 대상이 되었던 불로뉴 숲을 비롯해 벵센 숲, 뤽상부르그, 뷔트 쇼몽, 몽소 공원, 탕플 광장 등이 근대적 공원으로 변모하였다.

한편, 자연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도시의 문제는 위생과 공중보건의 문제였다. 1850년 파리는 상하수도 보급의 수준이 다른 나라, 특히 영국과 미국의 도시들에 비해 낮았다. 배수구와 하구구의 부족은 프랑스 모든 도시가 지닌 결함이었다. 1848~1849년, 1855년에 발생한 콜레라의 유행은 열악한 도시의 위생조건에서 비롯되었다. 오스만은 먼저 1850년대 주민 1인당 하루 26 갤런에 불과했던 물 공급량을 1870년에 50갤런으로 증가시키면서 신선한 식수를 공급하고자 노력하였다. 물 공급량의 개선과 동시에 하수도 처리문제가 대두되자 지하에 수도관을 쉽게 수리할 수 있고 내부구조물들도 수용가능 한 넓은 하수도 체계를 정비하였다. 1854년 163km에 불과했던 파리의 하수도 망은 1870년에는 536km까지 확충되었다. 신선한 공기와 햇빛, 물과 하수의 자유로운 순환이 도시의 청소 기능을 향상시키자 건강한 도시환경이 만들어졌다.

이상과 같은 대규모 토목, 건축 사업에 필요한 막대한 재원이 필요로 하였다. 오스만은 도시개조사업에 토지라는 사유재산이 자본주의적으로 경영되는 방식을 도입하였다. 부동산 소유권 행사 관행을 변모시키기 위해 규모가 큰 기획 사업에는 국가의 힘에 기대어 자금을 동원하고 작은 규모의 사업에는 민간의 자본에게 투자를 개방하는 방식으로 도시를 투자의 대상으로 전환시켰다. 건설 산업과 부동산 이권으로 대표되는 도시 자체에 대한 투자가 많은 수익을 보장해 줌에 따라 도시와 재정적, 부동산 이권을 둘러싼 자본의 ‘연합’이 형성되었다. 오스만은 시의회와 계획위원회를 독단적으로 지배하면서 전통적으로 사생활을 우선시하며 공공성에 무관심했던 부동산 소유자들의 반발을 제압하였다. 사유지를 저가로 매입할 수 있는 토지 수용권과 불건강한 환경을 개조하기 위한 도시위생 사업은 사익보다는 공공의 이익이라는 원칙에 따라 도시공간의 장기적 경영, 철거와 재건축의 법률적 수단이었다. 부동산 가격 상승과 함께 도시 내 자본의 순환이 형성되면서 도시 개조사업 과정에서 창출된 수익은 금융과 건설 사업을 주도한 소수의 자본가들에 의해 독점되었다. 중간 계층과 저소득 계층의 주택 건설은 파리의 개발 계획에서 제외되었다.

프랑스 제2제국의 첨예한 정치적 갈등은 명사계층과 ‘위험한 노동계급’ 사이에서 비롯되었다. 1848년 혁명 이래 정치적 봉기를 주도한 노동계급의 불만을 누그러뜨리는 오스만 도시개조사업은 효과를 나타내었다. 공공사업이 광범위 하게 진행되면서 1860년대 중반 파리 노동계급 인구의 50% 이상이 건설 부문에 종사하였다. 오스만은 근대적인 신맬서스주의정책을 통해  제2제국의 최우선 과제이자 불안요소인 실업을 조절해 나갔다. 그는 재정적 부담이 큰 전통적인 자선에 기초한 복지정책을 폐기하고 일자리 창출 문제를 곧 복지와 연결시켰다. 이제 빈곤은 곧 개인의 문제이기 때문에 파리시는 더 이상 빈민, 병자, 노인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없어졌다. 오스만 이후 파리시의 복지정책에서 시청의 역할은 축소되었고, 복지 행정의 중심지 역시 제한적인 지방분권화 정책과 함께 지역 구청단위로 재편되었다. 탈중앙집중화 정책과 함께 빈민구호의 책임은 사유화되었고 복지서비스의 담당은 행정의 하부단위로 이전되었다.

또한 오스만은 섬유산업으로 대표되는 ‘파리의 간판 품목’을 제외한 다른 공산품을 생산하는 공장을 도심 외곽으로 이전시켰다. 산업적 경쟁력이 부족하고 가죽 가공업, 화학 공업 같이 유해한 산업은 “제국의 수도”를 만들고자 하는 그의 욕망에 장애물이었을 뿐이었다. 더불어 오스만의 반산업적 도시정책의 또 다른 목표는 정치적으로 불온 세력인 노동계급을 파리에서 추방시키기 위해서였다.

오스만은 1867~1869년 사이에 발생한 재정위기로 인해 해임되면서 도시개조사업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할 때까지 프랑스 제2제정기 파리의 국가기구를 지배하였다. 오스만이 지배한 약 16년 동안 중세적 파리는 철거되고 재구성되면서 그 자리에 근대적 파리가 탄생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파리는 도시의 외형적 측면과 행정적 내부 구조의 두 측면에서 오늘날까지 유효한 자본주의적 근대성을 대표하는 도시로 변모하였다.


<참고문헌>
데이비드 하비, 김병화 역,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생각의 나무, 2005.
이창남, 「오스만과 근대 도시 파리의 경관: 발터 벤야민의 파사주 작품을 중심으로」, 『문화와 사회』, 8권, 2010.
최민아, 「파리 오스만 도시정비사업에 의한 근대 도시계획제도 도입 및 발전 연구」, 『공간과 사회』, 24권, 2014.
Michel Carmona, Haussmann(Paris: Fayard), 2000.
Pierre Pinon, Atlas du Paris haussmannien : la ville en héritage du Second Empire à nos jours(Paris: Parigramme), 2002.

작성자: 문종현(세종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