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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리얼리티(Hyperréel)
  분류 : 디지털도시와 문화적 재현
  영어 : Hyperreality
  한자 :


하이퍼리얼리티’(Hyperréel/Hyperreality)는 시뮬라크르(simulacre)와 함께 보드리야르(Jean Baurillard)를 대표하는 개념으로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Simulacres et Simulation)에 등장해서 널리 주목받았다. 에드워드 소자(Edward, W. Soja)포스트메트로폴리스(Postmetropolis)에서 보드리야르의 논의를 참조하면서, 하이퍼리얼리티를 도시 상상계의 재구조화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 개념으로 설정하고 있다. 따라서 먼저 보드리야르가 내놓은 하이퍼리얼리티 개념의 의미를 살피고, 이어서 이에 대한 소자의 수용을 다루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하이퍼리얼리티의 원래 표현인 프랑스어 Hyperréel은 실재를 의미하는 réel적정선을 넘어서는 것’, ‘극단화된 것을 의미하는 접두어 hyper를 결합한 단어이다. 보드리야르의 논의에서 이 개념은 시뮬라크르의 효과인 동시에 시뮬라크르를 발생시키는 모델이라는 의미로 정리될 수 있다. 먼저 시뮬라크르의 효과라는 것은 가공의 이미지가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오늘날 디지털 매체가 만든 이미지가 가상이 아닌 실재로 취급되는 상황이 여기에 부합한다. 다음으로 하이퍼리얼리티가 시뮬라크르를 발생시키는 모델이라는 것은 가공된 이미지들의 출처가 이미 원본이 아닌 이미지의 세계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에 따르면 통상적으로 이미지는 실재를 모델로 삼아 산출된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제 이미지들은 원본도 사실성도 없는 모델’, 즉 하이퍼리얼리티로부터 생산된다(보드리야르, 2001:12-6).

보드리야르는 현대 사회에서 하이퍼리얼리티가 실재의 자리를 대체하고, 실재의 관념을 핵심으로 삼아왔던 질서를 전복시킨다고 주장한다. 이때 하이퍼리얼리티가 실재를 대체한다는 것은 기존의 실재와 단순히 자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실재/비실재의 구분 자체가 아예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보드리야르, 2001:16). 다만 이러한 극적인 전환 속에서도 하이퍼리얼리티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일상생활에 깊숙이 개입하게 되는데, 보드리야르는 이를 하이퍼리얼리티의 은폐·조작하는 기능, 저지기계’(machine de dissuasion)로서의 기능 때문이라고 설명한다(보드리야르, 2001:41)

저지기계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보드리야르는 디즈니랜드를 예로 든다. 디즈니랜드는 마술과 환상의 공간이자 어린이들의 천국처럼 인식되어 왔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디즈니랜드의 어린애다움은 어른들의 진정한 세계가 다른 곳에 있다고 믿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까 디즈니랜드는 비합리적인 상상의 공간을 자처하면서 바깥의 다른 세상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한다. 여기에서 바깥의 다른 세상이란 실재의 세계이자 합리성의 세계를 의미한다. 하지만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디즈니랜드만이 특별히 가상 공간이고, 그곳이 다른 세계와 특별히 구분되어 취급될 이유는 없다. 가상의 이미지는 디즈니랜드만이 아니라 이미 미국 전체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즈니랜드는 실재와 가상의 경계선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설파한다. 보드리야르는 바로 이 대목에서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와 마찬가지로 하이퍼리얼리티의 질서에 속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저지하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보드리야르, 2001:39-41).

보드리야르는 저지기계로서 하이퍼리얼리티의 기능이 현실의 부정성을 은폐하는 데 전략적으로 동원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는 마치 감옥이라는 공식화된 제도가 사회 전체가 감옥이라는 사실을 숨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감옥이라는 공간이 별도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감옥 바깥의 사회는 감옥이 아니라고 믿지만, 이는 현실이 감옥과 같이 억압적이라는 사실을 은폐하는 것일 뿐이다(보드리야르, 2001:40).

나아가 보드리야르는 하이퍼리얼리티의 조작적 기능이 단순히 현실을 오도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세계 인식을 생산한다고 주장한다. 즉 하이퍼리얼리티는 시뮬라크르가 이미 현실이 된 세계에서 각종 지식과 정보가 생산되는 새로운 모체이다. 보드리야르는 미국의 워터게이트사건을 예로 든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일종의 과거 청산 모델에 따라, 닉슨 정부의 부패와 부도덕성을 드러내는 스캔들로 규정되었는데 보드리야르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의미화하는 방식이 스캔들의 이미지에 의존함으로써, 이것이 역대 정부의 다른 모든 부패와 비도덕성에 대한 문제제기들을 간단히 무효화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본다. 말하자면, 워터게이트 사건은 미국 정치의 원래 모습이 도덕적이라는 환상을 주입한 하이퍼리얼리티였던 것이다(보드리야르, 2001:43-6).

워터게이트 사례에서 드러나듯, 보드리야르는 하이퍼리얼리티가 사회와 정치를 이미지의 경쟁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게 한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사회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의 모든 활력은 결국 어떤 이미지를 선점하느냐의 문제로 귀착되고, 정치는 단지 더 관심을 끌 수 있는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가령 걸프전은 마치 컴퓨터 게임처럼 CNN 화면을 통해 전세계로 중계되고, 정치적 담론은 이를 전쟁의 참혹이 은폐된 유희적인 이미지로 소비한다. 9.11 테러 이후 이슬람의 정체성을 테러리스트로 결부시키는 고정관념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 각종 매체에서 이슬람 교도에게 부여한 테러리스트 이미지는 이슬람 세계에 대한 편견을 형성하고, 이 편견은 미국 우선주의를 추동하는 강력한 도구로 활용되었다(최효찬, 2016:38-40). 대중은 하이퍼리얼리티의 정치가 수행되는 과정에서 스펙타클의 구경꾼이자 조작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 과정에서 사안에 대한 문제제기나 토론, 실천적 저항 등이 점점 의미를 상실하며, 사회적 차원의 과정 일체는 하이퍼리얼리티 속에 용해된다. 이는 정치적 역동성을 상실한 노동이 단순한 고용의 지위로 인식되는 양상과 흡사하다. 보드리야르는 하이퍼리얼리티화된 세계에서는 사회적인 것 또한 그 혁명성을 잃고 일종의 광고 이미지로 전락하게 된다고 본다(보드리야르, 2001:159).

소자의 포스트모던 도시론은 보드리야르가 제시한 하이퍼리얼리티 개념과 그 영향력을 유효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소자가 이 개념에 주목했던 우선적인 이유는 하이퍼리얼리티가 도시 상상계의 재구성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다, 즉 하이퍼리얼리티는 실재와 가상의 경계가 사라진, 디지털화된 도시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하이퍼리얼리티 개념에 대한 소자의 논의는 단순히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소자의 진정한 관심은 하이퍼리얼리티에 내재한 정치적 함축에 있다. 소자는 하이퍼리얼리티의 기만적 가능성을 의식하면서도, 보드리야르가 견지했던 허무주의적인 전망에는 동의하지는 않는다. 소자는 셀레스테 올랄퀴아가(Celeste Olalquiaga)포스트모던적 신경 쇠약에 관한 논의를 참조하면서, 하이퍼리얼리티가 창조적인저항과 전복으로 이어질 가능성에 주목한다(소자, 2019:318-22).

올랄퀴아가에 따르면 우리는 하이퍼리얼리티 속에서 길을 잃고 불안해하는 현상, 곧 신경쇠약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올랄퀴아가의 논의에서 신경쇠약은 완전히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올랄퀴아가는 포스트모던적 시공간의 혼란이 도시 문화를 거대한 홀로그램으로 변환시키는 가운데, 진보 정치에 기여하는 급진적 이미지들이 생산될 것이라고 기대한다(Olalquiaga, 1992:1-5). 올랄퀴아가가 사례로 들고 있는 것은 지배적인 서구 문화의 전형이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창조적으로 변형되는 양상들이다. 이를테면 오토바이를 타고, 디스코를 추며, 브라질 카니발에 등장하는 인디언 집단, 슈퍼히어로 복장을 한 채로 빈곤과 오염에 맞서는 사회운동가의 사례는 매스미디어에서 주입된 이미지가 유머러스하게 전복되는 것을 보여준다(Olalquiaga, 1992:81-2, 86-7). 올랄퀴아가에게 이러한 사례들은 마술적 하이퍼리얼리티로 규정되는데, 소자는 이를 참조하면서 하이퍼리얼리티의 지배 이전으로의 회귀가 아닌, 하이퍼리얼리티의 개방성이 급진 정치로 발전할 가능성을 옹호한다(Olalquiaga, 1992:75; 소자, 2019:321). 그에 따르면 이미지의 지배 가운데에서도 선택을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도시 공간을 살아가는 거주민들의 몫이며, 이들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도시는 하이퍼리얼리티의 감옥이 될 수도, 해방구가 될 수도 있다.

소자는 하이퍼리얼리티의 개념에서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을 탐색하는 가운데, 전통적인 좌파 정치의 실패를 하이퍼리얼리티의 기만과 연결짓는다. 그에 따르면 좌파 정치는 하이퍼리얼리티를 해석하고, 그 기만적 가능성에 대응하는 데 적극적이지 않았다. 소자는 이것이 반동적 포스트모던 정치에 주도권을 넘겨주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보면서, 보수화된 포스트모던적 사유에 대응하는 전략적 포스트모던 급진 정치의 핵심이 하이퍼리얼리티를 다루는 방식에 있다고 주장한다(소자, 2019:342, 347). 그것은 하이퍼리얼리티의 지배 이후 실재가 떠난 공간을 도시민의 집합적인 창조적 의지와 전략적 대응으로 채워가는 것을 의미한다. 소자의 이러한 입장은 하이퍼리얼리티의 기만적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개방성이 더 큰 사회적·공간적 정의에 기여할 수 있다는 믿음에 바탕해 있다. 가령 사이버공간은 소외된 이들의 온라인 접근가능성을 주장하는 새로운 사회운동의 장이 될 수 있으며, 이러한 투쟁은 인종·계급·젠더·지리의 경계를 초월해 혼성적인 상호문화적인 연합으로 확장될 수도 있다. 물론 소자는 이러한 전망이 성찰적 수고 없이, 자동적으로 현실화될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소자에 의하면 하이퍼리얼리티의 급진 정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이퍼리얼리티를 다원화된 현대 정치문화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그 의미를 비판적으로 독해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소자, 2019:328, 348-9).

 

 

참고문헌:

 

에드워드 W. 소자, 이현재·박경환·이재열·신승원 옮김, 포스트메트로폴리스 2, 라움, 2019.

장 보드리야르, 하태환 옮김, 시뮬라시옹, 민음사, 2001.

최효찬, 장 보드리야르, 커뮤니케이션북스, 2016

배영달, 보드리야르와 시뮬라시옹, 살림, 2005.

Celeste Olalquiaga, Megalopolis : contemporary cultural sensibilitie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2.

 

 

작성자:신승원(서울시립대 강사)